“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 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꿈 속의 악마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대들이 자기 자신과 사물을 변혁하고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때, 바로 그러한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그들은 노심초사하며 과거의 망령들을 주문으로 불어내어 자신에게 봉사케하고, 그들에게서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린다.” 맑스가『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말한 이 언급에서 우리가 보수주의의 유령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수사일까? 잘 알려진 것처럼 보수주의가 프랑스혁명에 대한 버크(Burke)의 비판을 그 기원으로 한다면 애초에 보수주의는 맑스의 표현을 빌리면 ‘혁명적 위기’라는 조건에서 배태한 것이다. 그렇다면 버크의『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80, 이하『성찰』)은 죽은 자들을 주문으로 불러들여서 죽은 자들의 유령이 살아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그 주술을 강령으로 하는『보수주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보수주의라는 유령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레닌의 문제의식 역시 역사의 혁명적 위기를 조건으로 한다. 이 위기는 이른바 ‘임박한 파국’의 조건에서 위기를 기회로 삼는 기예(art)를 요구하는 문제이자, 역사의 질적 변화를 위한 문턱/국면이다. 하지만 보수주의는 같은 위기의 순간이 기회가 아니라 말 그대로 위기 그 자체가 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보수주의에게서 위기 역시 ‘임박한 파국’인 셈이다. 그래서 보수주의는 “무엇을 지킬 것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가『악령』에서 19세기 중반 러시아를 뒤흔들던 합리적이고 진보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일련의 경향을 ‘악령’이라 했을 때 이 표현의 정치적 함의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러시아 사회의 임박한 파국에서 그가 지켜야 할 것으로 본 것은 러시아 정신, 전통적인 러시아 정교의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위기라는 조건에서 배태되었다는 그 기원의 성격에서 보듯이 보수주의는 역사적 국면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한국형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일반에서 일탈한 것임을 쉽게 논의할 수 있는 반면, 가령 ‘한국형 보수주의’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보수주의 일반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간단하게 치부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립하기 보다는 특정한 국면에서 반테제의 형태, 부정의 형태로 역사에 개입하는 수동성이 보수주의 한 특징이다. 버크가 혁명을 불완전한 인간의 이기적 충동과 편협한 시각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을 때 그는 인간존재와 이성의 한계를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본래적으로 인간의 기획이 제한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유한한 이성과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한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는 이처럼 불완전한 것에 기반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불완전성을 곧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하는 버크(보수주의)에게 이 본성은 외부의 어떤 힘을 통해 규율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것, 강제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유기적인 한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서 사회 구성의 원리로서 요청된다. “사회는 단순히 살고 있는 자들 간의 동업이 아니고 산 자, 죽은 자,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자들 간의 동업이다.”고 말할 때 버크는 사회의 재생산, 즉 사회적 관계의 축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 셈이다. 버크에게 역사의 단절은 곧 사회적 관계의 해체로서 결코 승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의 한계에 기반한 버크의 사고는 완전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절대적인 준거나 대상을 필요로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이나 종교, 특히 버크에게 기독교는 영혼의 안식처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축적은 인간사회 외부에서, 즉 인간을 넘어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버크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종교적 동물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언제나 사회적 동물이다. 보수주의에서 이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자유주의의 가정처럼 개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성의 조건에서 경험과 편견, 관습, 관행 등의 소위 ‘전통’의 누적의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크에게 사회적 관계는 시간을 매개로 한 역사의 구성물이고 그런 한에서 전통이 사회적 관계가 된다. 맑스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수주의적 인간관에서 인간은 전통의 담지자인 것이다. 전통의 담지자로서 인간은 이미 역사적인 인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차라리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누적’의 용어가 아니라 관계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역사적 조건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즉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서 인간과 역사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모범답안으로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문제시 삼기보다는 애초에 인간은 역사적으로 생산되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조건과 제약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인간과 사회, 역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 외부의 초월적인 대상을 가정하거나 그 개입을 요청할 필요도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만큼 탈역사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생산이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인 것처럼, 보수주의에서 사회의 구성원리로 설명하는 전통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전통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역사적’이라는 수식이 단순히 수사적인 ‘전통’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서 자본주의적으로 강제되고, 자본주의적 관계에 포섭된 또는 포섭되어가는 전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나친 것일까?
하지만 버크의『성찰』이 번역되지 않은 한국 사회의 이 보수적 ‘전통’을 ‘한국적 보수주의’라는 편리한 수사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최근에 번역된 R.니스벳의『보수주의』(강정인 역, 이후, 2007)는『에드먼드 버크와 보수주의』(강정인 역, 문학과 지성사, 1997)에 실린 세 편의 논문 중 제2부「보수주의」논문과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