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도 혁명이 가능할까? 근대적 의미에서 과학은 대개 객관화, 가치중립성의 용어로 설명되었다. 베버(Weber)를 언급한다면 이러한 방법론은 비단 자연과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정당성을 확보한다. 즉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분리, 존재에 대한 인식과 당위성에 대한 분리는 이제 이른바 ‘과학적’ 연구 지침이 된다. 어떤 이론이나 연구의 추상성 수준과 상관없이 그것이 ‘과학’으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언제나 실험이나 실증적 절차를 통해 경험적으로 확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자연과학적 실험의 경우 그 반복적 특징으로 인해 다른 연구자가 동일한 통제 하에 실험을 하면 같은 결과가 도출되어야 하며 사회과학적 연구 역시 통제변수를 동일하게 할 경우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간의 인과관계는 반복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험과 이론의 일치가 과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치는 특정한 원인과 특정한 결과 간의 인과관계, 즉 검증 가능한 가설의 형태로 과학의 한 계기가 된다. 이렇게 정립된 가설의 경험을 통한 검증, 또는 포퍼(Popper)의 논의를 빌면, ‘반증가능성’의 확인 여부는 결국 과학적 이론 구성의 기본 골격이 되는 셈이다.
과학, 특히 근대적 의미의 과학 개념이 이러하다고 할 때 ‘과학 혁명’이라는 말은 자기 모순적이지 않은가. 우리가 토마스 쿤의『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을 때 드는 첫 번째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당연하게 예상되고 제기되는 이 물음에 대한 자신의 대응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혁명은 앞서 말한 과학의 객관성, 검증가능성, 존재와 당위의 분리 등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혁명은 대개 파토스(pathos), 열정, 의지, 당위, 목적 심지어 기예/기술(art) -레닌은 혁명은 기예라고 했다- 등으로 설명된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낭만성의 전형으로 찬양되거나 반대로 경멸당한다. 이처럼 서로 이질적이다 못해 대립적으로 보이는 과학과 혁명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양자는 조응가능하며 접합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의문을 중심으로 저자와 대면하고 있다.
우선 개념에서 시작하자. 오늘날 우리는『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지 않아도 ‘패러다임’(paradigm)이란 용어를 쉽게 사용한다. 이 일상화된 용어는 그 용법의 층위가 매우 다양하지만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어서 사용되거나 그 외연이 확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념이 특정한 경계를 기준으로 또는 그런 경계를 설정했을 때 내포와 외연의 문제라한다면 오늘날 패러다임이란 용어는 이미 개념이 아닌 것이 된 셈이다. 그 경계도 없고 그런 만큼 외연과 내포를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용어의 저작권자인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을 다음처럼 정의한다. “나는 이들 패러다임을 어느 일정한 시기에 전문가 집단에게 모형 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과학적 성취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저자와 우리의 대면은 이 개념과 대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개념에 대한 서술 중 ‘어느 일정한 시기’란 저자가 말하는 ‘역사’이며 ‘역사적 고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축적에 의한 발전’(development by accumulation)이라는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문제설정에 대한 비판이 된다. 즉 과학의 발전 또는 진보는 지속적인 축적이나 누적이 아니라 오히려 단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단절, 즉 과학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전혀 새로운 과학의 개념’을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개개의 발명과 발견의 분리 불가능을 정상과학이 상정하는 누적이나 축적의 개념과 상충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 또는 과학사에 대한 ‘역사적 연구’야 말로 이러한 분리 불가능을 과학(사)의 현실로서 온전하게 승인하는 접근방법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렇게 되면 과학사는 단절적이며 그런 만큼 분리된다. 가령 전근대 과학과 근대과학의 ‘관계’가 상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또는 그 관계를 일괄적인 진보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더 이상 과학사에 대한 사실적 접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차라리 “바로 그 당대에서의 그 과학의 역사적인 온전성”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이 온전성은 역사적으로 분리된, 역사적 한 단위, 즉 특정 패러다임의 정합성을 의미한다. 모든 과학은 그것이 당대에 정상과학일 때 그 나름의 정합성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저자는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학에서의 분절/단절을 역사 또는 역사적 접근의 구도로 이해하는 저자에게 “역사적 고찰은 과학의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파격적인 주장, 즉 정상과학의 통념에 反하는 주장은 저자가 자신의 이 저작을 ‘에세이’라고 거듭 밝히고 있다하더라도 논의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그 파장은 심대한 것이다. 이는 서두에 밝힌 바 과학 혁명이라는 대립되는 용어의 접합이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사)의 과정 또는 역사 -정상 과학식으로 말하면 ‘축적 과정 속의 진보’-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논리 또는 문제설정 자체도 이후 혁명적인 영향을 야기했다는 점에서 ‘혁명’인 것이다. 저자의 이런 혁명적 문제설정은 ‘임의성’을 승인/허용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임의성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제6장「이성 현상 그리고 과학적 발견의 출현」,제7장「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 제8장「위기에 대한 반응」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고 밝히고 있는데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임의성과 이상(異常) -이상은 기존의 정상과학, 즉 패러다임에서의 전문적 예측과 끊임없이 반발하는 현상, 결과를 말한다- 위기 등을 동시에 사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이러한 임의성이 항상 잠재적인 형태로 정상과학을 내파 또는 붕괴시킬 가능성을 갖는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임의성, 이상이야 말로 ‘우연’적인 요소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거나 기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진행에 있어 본질적이며, 그 과정을 추동하는 기본 동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정상과학은 ‘의지’로 설명된다. 근대적 과학의 방법론은 서두에 밝힌 것처럼 의지로 부터의 자유를 기본적으로 요구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정상과학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요구되는 것이다. 임의성이나 이상이 반복적으로 출현하고 정상과학이 이 도전/대결에 대응하는 양상이 곧 의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적 과학을 저자의 논의를 따라 하나의 역사적 단위, 즉 패러다임으로 본다면 이 단위 역시 자기 완결적이라기 보다는 그 지위의 재생산을 위한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중세적 세계관 -흔히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의 前史로 간단히 치부되는- 과 크게 다를게 없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패러다임의 정의로 돌아가면 패러다임은 “모형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과학적 성취”다. 이는 곧 패러다임이 특정한 문제설정(problematique)라는 의미다. 즉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아니 그 문제라는 것 자체를 승인하고 제기하고 결정하는 것, 문제가 문제일 수 있는 것 역시 특정한 문제설정에 기반해서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설정은 그것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특정한 정향을 갖는다. 그것이 해답이 되든 그러한 과정이든 이미 특정한 문제설정으로서의 패러다임은 자기 발전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재생산과정을 우리는 정상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저자는 이것을 ‘정상과학의 개념 상자’ 속에 밀어 넣으려는 의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extraordinary) 탐구’야 말로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계기가 된다.
이제 우리는 문제 그 자체부터 문제가 제기되는 방법과 그것이 해결되는 과정의 지반으로서 문제설정, 역사적 단절로서 당위, 즉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궁극적 하나의 발견은 … 이론의 조직망을 개편시킨 후에야 일어난다. 과학적 사실과 이론은 … 범주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강조는 인용자)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과학자의 세계가 사실이나 이론의 영역에서 근본적 … 질적으로 변형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학혁명의 역사는 ‘축적’의 역사가 아니라 ‘단절’의 역사다. 과학적 방법론, 특히 맑스주의적 방법론으로서 변증법으로 과학혁명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는 과학혁명의 과정이 ‘지양’이나 ‘부정의 부정’을 통한 단계론적인 관계나 그러한 관계들의 총체성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계기를 구성하는 한 단위로 분할한다는 점, 즉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관계를 기반으로 역사를 각각의 단위로 이해한다는 점은 유사하다. 그 각각의 사회구성체는 각각의 생산양식이라는 특정한 문제설정, 즉 지반이라는 점에서 한 사회구성체를 토마스 쿤의 용법을 빌리면 한 패러다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각 역사적 단위가 맑스에게서는 한 단계로서 더 나은 단계로 지양하기 위한 계기가 되지만, 토마스 쿤에게 과학의 역사적 단위는 그 자체로 자기 정합성을 갖는 것으로 상정된다. 하지만 쿤이 임의성, 이상 등을 정상과학의 위기의 계기가 된다고 보는 점, 그래서 이를 통해 비로소 이른바 ‘과학혁명’이 가능하다고 보는 점은 사실 쿤 역시 역사를 단절적으로 분할하여, 각 패러다임 간의 관계를 사장하기 보다는 다음 패러다임으로의 이행 계기를 이전 패러다임에서 잉태하고 있다고 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쿤은 ‘발전’ 개념을 각 역사적 단위에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맑스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이런 점이 맑스가 이른바 ‘과학적’ 방법론으로 역사일반에 대한 혁명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쿤도 배타적으로 보이는 과학과 혁명을 접합시킬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억측은 아닐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관계와의 단절, 즉 기존의 정상과학, 패러다임과의 단절을 승인한다는 점에서 쿤의 작업은 이미 ‘혁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