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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delion
  •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정명원
  • 13,500원 (10%750)
  • 2021-07-09
  • : 2,253


김웅, 문유석 판사와는 또다른 결의 내공이 어마어마한 법조인 작가가 탄생한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김지혜 교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그 느낌이 왔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게 짜잔, 나타난 저자의 첫 책. 읽을수록 이 작가 뜰 것 같다는 그런 느낌.

저자의 글은 곱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난다. 문장 하나하나에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무심결에 내뱉은 말마저도 따뜻한, '척'이 아닌 정말로 온기가 가득한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무의식 중에 날을 세웠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날, 여자가 말한 것이 ‘사랑’이었다면, 나는 끝내 여자의 말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사랑의 존재를 믿는가 아닌가의 문제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날 여자가 나에게 말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이었다. 꺼짐으로, 비어버림으로, 떠남으로만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있다. 사랑보다는 ‘사랑이 떠나고 텅 비어버린 자리에 남은 것’이 훨씬 더 미덥다. 불꽃이 꺼진 자리에 하얗게 남은 그것으로부터, 안쓰럽고도 굳건히 내 눈을 응시하던 여자의 마음을 나는 의심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_189쪽

 

저자는 법조인임에도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검사이다. 세상에 꼭 법조인이 아니더라도 자기 잣대로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고, 선입견을 가지고 가볍게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정말 이 책의 저자의 이야기대로 '인간에 대한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어딘가에 악플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그래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재판장에 앉아 있는 검사는 얼마나 숱한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며, 얼마나 함부로 판단하기 좋을 상황들이 많았을 것인데 이 책의 저자는 16년 동안이나 검사석에 앉아 있었음에도, 여전히 단 한 사람의 억울함도 빚어내지 않아야 할 것을 걱정한다. 내가 저자에게 결정적으로 반하게 된 지점이다.

 

"더 정확히 지나간 시간을 재현해내고 가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실한 증거들 앞에서 주저하게 되는 날들이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실한 증거에 의해 명명백백히 재구성된 듯 보이는 사실 앞에서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낀다. 그것은 희미한 증거를 더듬을 때와는 다른 모종의 주저함이다. 멀고 희뿌연 것을 더듬어 진실에 가장 가까운 곳에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써오던 자의 오랜 관성 같은 것일까. 상상력이 배제된 사실확정의 지점에서 꼭 한 번은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50-51쪽)

 

세상에 이렇게 깊이 있는 사람들만이 있다면 좀 덜 억울하고, 좀 덜 힘든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세상이 온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정명원 검사의 이 책이 좀 더 널리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읽게 되어 '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많이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늘어나는 것만은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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