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read with me
  • [전자책] 김지은입니다
  • 김지은
  • 11,900원 (590)
  • 2020-03-13
  • : 1,949

이 책을 읽으며 참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슬픔, 분노, 허탈감, 혼란스러움, 유대감, 기쁨… 책에 적힌 문장 하나하나에서 김지은님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짙은,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느껴졌다. '아직' 성범죄를 당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성범죄 피해자들과 온전히 공감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성차별을 20여년간 겪어온 나에게 또 공감하는 것은 성차별에 맞서는 것보다 훨씬 수월한 일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떠오른 감정들 중 다른 것들은 설명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기쁨'만큼은 꼭 글로 적고싶다. 거의 400페이지에 달하는, 그리고 수만장의 종이가 있어도 다 담을 수 없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결국 살아남아 보란듯이 책을 출판한 김지은님의 모습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다행'스러움과 '기쁨'을 느꼈다. 미투를 하기 전에는 가족에게도 자신의 상태를 꾹꾹 숨기고 혼자 모두 감내하려고 했던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조금씩 천천히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듦을 드러내는 김지은님의 변화가 정말 기뻤다. 무수히 많은 시간동안 너무 아프고 힘들어 죽지 못해 살아오면서도, 중간중간 보여준 김지은님의 용기로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것이 느껴져서 기뻤다.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 참 많다. 물론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하는 행동 중에서도 남을 해하려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은 전혀 결이 다르다. 김지은님이 당한 2차 가해의 아주 일부분만 책에서 읽었는데도 치가 떨리고 소름이 끼쳤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왜 나서서 피해자에게 상처를 줄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악랄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왜 사람들은 친분을 앞세워, 팬심을 앞세워, 혹은 단지 피해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앞세워 피해자에게 또 다른 악랄한 짓을 하는 것일까. 가해자의 가족은 원래부터 못되고 잔인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이 사회가 범죄를 저지른 지배층의 가족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이 사건의 가해자는 안희정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 안희정 혼자만은 아니다. 안희정에게서 시작되어 안희정으로, 안희정에게서 시작되어 무수히 많은 다른 안희정으로 가해자의 범위가 넓어진다. 아직도 가해는 계속되고 있고, 피해자는 여전히 힘들게 지내고 있다. 


한국의 처벌 강도는 다른 나라와 견주어보면 아주 관대하다. 범죄자들에게 관대한 나라, 그게 한국의 또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권에는 기본적으로 선순위 후순위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가해자의 인권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피해자)의 인권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가해자의 인권을 피해자의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됐다. 가해자 가족들의 인권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은 가해자와 그 가족들의 것보다 훨씬 우선이 되어야 한다. 가해자는 자신의 선택으로 가해를 했지만 피해자는 결코 자신의 선택으로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명심하고 피해자를 중심으로 일을 결정하여야 한다. 그들의 치료에 온 힘을 다하는 동시에 가해자로서의 보호도 철저하게 해야한다.


아직도 세상에는 화가 나는 일이 아주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계속 화를 내야 한다. 세상의 어두운 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아무런 감정 없이 대하다보면 피해자를 지키는 방법 또한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위에 적은 모든 것들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범죄는 자신의 선택이다. 정신과적 사유가 있는 것이 아니면(그렇다 해도 범죄는 정당화되지 않고, 범죄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치료를 받아야하지만) 사람에게는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 그들의 선택이다. 나도 20여년간 살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선택을 했고, 그 모든 선택들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는 목적으로 어떤 선택을 한 적은 결단코 없다. 나는 그저 상식적인 나라에서 상식적인 사람들과 상식적인 일상을 지내고 싶다. 상식적인 선택이 가득한 세상이 되면 좋겠다.

설령 얼굴을 가리고 미투를 했더라도 나의 모습이 온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유명 정치인 수행비서의 얼굴은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개인정보도 금세 노출될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숨겨질 수 없었다. 블라인드 뒤에서 미투를 한다면 온갖 억측이 사건을 가리고 수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폭력 사건 본질 그대로, 진실 그대로 알려지길 원했다.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을 테니 제발 사건에 집중해달라, 제발 제대로 수사해달라, 진행 과정을 지켜봐달라 애원하는 마음으로 나를 방송에 드러냈다.- P65
밥을 뜨려다 말고 황급히 버스 시간을 알아봤다. 절대 나 때문에 일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었다. 차편이 없어 엄마가 급하게 나를 도청까지 차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 평소 엄마의 실력으로 운전하기에는 어려운 길이었다. 가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를 내려주고, 엄마는 다시 그 차를 몰고 혼자 집까지 되돌아가셨다.- P113
모든 것을 혼자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미 생활과 업무의 경계를 잃고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에 무력하게 젖어든 상태였다. 섬에 갇힌 듯 일에 매몰되어갔다. 그 중간 중간 자행되는 성폭력과 곧바로 이어지는 사과에 혼란스러움은 더 가중됐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정신도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무슨 업무든지 수행하고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수행비서의 철칙이 나를 옥죄었다. 그리고 훗날 재판에서 노동자로서 비서로서 성실히 일했던 나의 이런 행동은 모두 "피해자답지 않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P116
일단 정신을 차렸다. 유죄가 나올 것 같았다. 빠르게 유죄 판결에 대한 입장문을 적기 시작했다. 유죄 판결에 대한 입장문을 적고 전달을 위해 프린트를 해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속보가 떴다.

"피고인 유죄 3년 6개월 징역"- P174
이제 내게 꾸미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야기를 또다시 듣고 싶지 않다. 가끔은 예쁜 옷을 입고 싶어서 박하 맛 사탕처럼 톡톡 튀는 잔꽃무늬 파자마를 입고 잔다. 팔부의 긴 소매 옷이다. 어디 나가지는 못하지만 색깔 있는 꽃무늬 파자마를 입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리고 다시 외출을 할 일이 있으면 우중충한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스스로 피해자다움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P237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혔지만, 피해자의 일에 함께하는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P344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