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은 언제나 술을 부른다. 때로는 한창 바쁜 중에도 ‘주신’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며칠 전 그날이 그랬다. 무언가 뒤숭숭하고 풀리지 않는 그런 상황,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존재가 미소함을, 별처럼 빛나지 않음을 피부로 느끼는 그런 날.
도로를 가득 메운 차, 그 도로 한가운데로 버스가 달리고, 그 옆으로 늘어선 승용차, 그 틈바구니에 택시들이 거북이처럼 기어간다. 빨간불이냐 파란불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버스는 주로 달리고, 택시는 늘 기어간다. 사실 그들이 운전대를 잡은 까닭은 자기네 인생에 빨간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 당한 아버지들, 숱하게 많은 자소서를 제출했지만 낙방하기만 수백 번한 친구들, 그들 모두 막막한 인생 앞에서 특별한 기술 없이 ‘증’ 하나만 있으면 밝힐 수 있다는 ‘등’을 선택한 것이다. 운전대는 그들에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그날 사당까지 가는 택시, 남산터널을 지날쯤 말문이 트인 기사 아저씨는 연신 “이게 우리 택시 기사네 현실이요” 했다.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주 6일 하루 12시간 2교대, 허리 빠지게 운전석에 앉아 있어도 월 200을 벌기 힘들다 했다. 회사 택시는 사납금에, 개인택시는 LPG값에 살 길이 막막하다는 내용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우리네 현실이요” 그 말이 유독 절절하게 다가왔다.
12시가 넘은 늦은 밤, 중앙차선에는 간혹 심야 버스가 달렸다. 곧 내가 갈아탈 버스도 스쳤다. 지금 대통령이 시에 있을 때 빨강‧파랑‧초록 옷을 입힌 그 버스 기사 아저씨의 연봉이 3,000만원이라고 아저씨가 일러 주었다. 좋은 대학 나와서 대기업 들어가는 신입사원의 초봉과는 견 줄 액수가 아니지만, 그 말을 하고 있는 우리에겐 꽤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지금도 택시 운전대를 놓고 대형면허를 따려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를 위해서도 헤치고 나갈 관문이 많았다. 대형면허야 쉽게 따는 것이고, 그 뒤로 마을버스 경력을 쌓아야 시내버스에 원서라도 들이밀 수 있다고 했다. 그마저도 ‘시청 과장 빽’을 써서도 들어가기 힘들다 목소리 높인다.
그날 우리가 한 잔 들이킨 장소는 동교동삼거리였는데, E와 J는 동교동삼거리에서 연신내 방면로 가는 택시는 없다고 했다. 조금 더 걸어 홍대까지 나와 택시를 잡았다. 그렇게 나는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깡마른 아저씨의 택시를 잡아타고 사당으로 출발했고, E와 J는 길게 늘어선 택시 중의 한 대에 올랐다. 둘이 탄 택시는 시속 90km로 시내를 달리다가, 110km까지 속도를 내더니, 급기야 사고까지 날 뻔했다고 한다. 심지어 코너를 돌 때도 속도를 완전히 줄이지 않아, 한 블록 앞에 집을 두고 ‘티 안 나게’ 내렸다고 했다.
“우리 기사네 현실이요”를 입에서 내리지 않던 그래도 순하게 생긴 아저씨는 연신내‧정릉‧은평뉴타운‧미아리는 택시 기사들에겐 무덤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E와 J는 죽음 문턱에 간 듯했지만, 아저씨는 이미 무덤 안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차로 서울시내를 도는 게 가장 무섭다고 했다. 심야할증이 붙은 그 시간 전후로 손님을 태우고 빠르게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그 먼 곳까지 갔다가 다시 공차로 돌아오는 날은 “장사를 망친 날”이라고 했다. 손님을 태우고 광화문에서 종로3~5가까지 가면, 동대문을 기어이 거쳐야 하는데, 그 길을 지나기가 가장 무섭다고 했다. 길게 꼬리를 물고 택시를 잡는 행렬 대부분이 서울 동북부 외곽 주택 밀집 지역으로 가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란다. 일진이 안 좋아 그쪽 방향 손님을 태운 날은 시간 단축을 위해 ‘난폭 운전’을 하는 사람이 많고, 그러니 한 달에 1~2명씩은 꼭 인생을 서둘러 간다고 했다.
이틀 후, 구로에서 안양까지 가기 위해 잡은 ‘안양 택시’ 젊은 아저씨는 ‘택시 판 강남 스타일’을 알려줬다. 강남에는 수도권 서남부 지역에서 올라온 택시들이 모인다. 대략 성남‧안양(과천, 의왕, 군포) 차들인데, 이들에게 쪽박은 자신의 지역으로 가는 승객들이었다. 소싯적 여자에게 인기 좀 있었겠다 싶게 잘생겼던 젊은 아저씨는 “돈 벌려면 용인 가는 손님을 태워야 한다”고 점잖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리는 훨씬 멀지만 고속도로로 달려 시간은 단축되고, 돌아올 때는 용인으로 갔던 대리 기사를 명당 3000원에 태워 올라올 수 있다 했다. 공차로 돌아오더라도 안양 손님 태우는 것보다는 훨씬 이문이 남는다 했다. “평촌이요” 하고 당당하게 외친 중장거리 손님인 나는 순간 쫄아 “오늘 장사 쫑쳤네요?” 하고 물었다. 다행이 구로에선 안양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는 위로의 대답을 듣고 안도했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자. 깡마른 아저씨는 ‘택시 기사네 밥줄’만 걱정하진 않으셨다. 하루 세끼 걱정에 목소리 톤을 조금 더 높일 법도 한데, “대중교통 확장을 지향하는 서울시의 현 정책은 바른 길로 가고 있다” 했다. 택시 수는 줄여야 한다는 말에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체념이 묻어 있었다. 택시 수를 줄이고, 사납금 비율을 낮추어 택시 기사들이 먹고 살 길을 열어주면 좋겠다는 아저씨의 마지막 기대가 자판을 두드리게 한다.
인생의 불을 환하게 밝히겠다며 운전대를 잡는 이는 드물다. 켜졌다 꺼졌다 하는 ‘택시 등’처럼, 인생을 ‘빈 차’가 아닌 그래도 무언가 하며 살아보겠다며 마지막 선택을 한 이들이다. 스웨덴과 나미비아를 한국 복지국가의 모델로 스웨덴을 모델로, 나미비아를 복지국가 반면교사로 상정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최연혁, 쌤앤파커스)를 읽으며 가장 부러웠던 스웨덴의 모습은 ‘사회안전망’이었다. 빨간불이 켜진 사람들을 1차적으로 직장이 책임지고, 다음엔 국가가 감당한다. 그 뒤에는 가정이라는 뒷배가 있다. 가정이 뒷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역시 ‘사회안전망’ 덕분이다. 한국에선 ‘택시’가 그 역할을 하진 않았을까, 이젠 그 안전망마저 부실해진 마당에 그 다음 대책은 무엇일지,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가 딱히 손에 잡히지 않아 갑갑하다. 별처럼 빛나지 않더라도, 미소한 먼지일지라도,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네, 서로 보듬어 안고 살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는 그런 날들이 계속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