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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dire Veritati

- 현지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라


오랜만에 일을 시작하면서 포스팅이 늦었다. 달랑 1달에 2주를 나가는 것뿐인데, 글을 쓸 여유를 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그래도 일하러 나가는데 남은 2주는 쉬어야지 하는 안락한 마음 때문이었다.


다행이 2주 간의 빡빡한 마감, 2주간의 굴러먹는 시간의 반복 속에 1장의 사진과 마주쳤다. 마이클 안토니우스 우리(MU)가 페이스북에 남긴 몇 장의 사진 중 하나였다. MU는 동티모르의 그리움과 애정을 담아 '보고싶다'는 글을 남겼다. 덕분에 푹푹 찌는 여름 한가운데서도 잠시 웃을 수 있었다.



파사베로 가기 위해 트럭에 오르자마자 찍은 사진이다. 소가 보이고, 브라더 송의 뒷모습, 모자에 스카프로 칭칭 감아 자외선 완전 차단에 도전한 도라와 아직은 하얀 연정이, 이제 막 살이 빠지기 시작한 내모습과, 이런 여행일 거라 예상했다는 표정의 윤애 누나가 보인다. 그리고 그 주변에 우린 한국인 아닌 현지인이오 하는 표정으로 있는 분들이 서 있다.


피부 하얀 무리가 사람들 눈에 띄긴 했나 보다. 유엔 경찰 1명이 우리에게 접근했다. 경찰이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뱃살이 많던 그는 우리 중 한국에서 온 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2003년 3월 오에쿠시 에까뜨 강에서 숨진 상록수 부대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원에 추모비가 있으니 꼭 들러 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동티모르 주재 한국 대사관은 이날의 사건을 이렇게 짧게 소개한다. "2003.3.6 오꾸시 소재 에까뜨강 도하중 집중호우로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4명 순직, 1명 실종되었으며, 그 추모비가 오꾸시 공원에 건립됨"(동티모르 주재 한국대사관', 동티모르 개황', 2009.6)


그 죽음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그 죽음이 거룩하고 성스럽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는 180도 달랐다. 집중호우로 불어난 물은 절대 건널 수 없다고 수없이 말렸지만, 제 정신이 아니었던 그들이 이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다리를 넘었다는 것이다. 마른 강을 달리는 트럭 위에서 윤애 누나는 우기만 되면 강을 건널 수 없다고, 우기 동안에 건너 마을은 고립된다고 거듭 말했다. 이런 안내와 충고는 이후 1년간의 일정을 정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우기를 피해 건기에만 오에쿠시를 드나들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통 이해되지 않는 유엔 경찰을 뒤로 하고 우린 소와 함께 쩍쩍 갈라진 강바닥을 건넜다. 사실 2000년 동티모르 사태 때, 인도네시아 군이 다시 밀고 들어올 때도 유엔군은 가장 먼저 자국 또는 주변국으로 도망가기 바쁘지 않았던가. 우리가 그 죽음을 통해 교훈삼을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현지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라"


우리가 올라 탄 노란 트럭엔 우리만 타는 게 아니었다. 3마리의 소, 그 등에 올라 탄 새카만 쇠파리, 뚜민, 퀴비셀로, 우시타케노, 파사베로 가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하나하나 타기 시작했다. 마른 강을 걸어 가던 이들도 차를 세우곤 합승하기도 했다. 난간에 걸터 앉고 여기저기 쪼그려 앉으니 족히 30명이 넘는 이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팔 힘이 좋은 남자들은 천막을 덮도록 해 놓은 쇠 위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덜컹덜컹 하는 차 위에서.


먼지 폴폴, 꾸불꾸불 산을 넘어, 퀴비셀로에 소들을 내리고, 파사베에 도착했다. 알고 지내던 집에 가방을 던져 놓고는 말레랏으로 향했다. 오에쿠시에서 가장 높다는 마을, 그래서 건기가 한창인 중에도 긴팔을 챙겨가야 초저녁을 날 수 있다는 곳이었다. 평화캠프에 참가했다는 파사베 마을 청년의 뒤를 따라 지름길로 올랐다. 모든 지름길은 험하다. 거의 수직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말레랏의 노을을 뒤로 하고 우리는 한 무덤 앞에 섰다. 길을 가던 청년을 불러 세웠다. 물을 길러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양 손에 들고 있는 물통이 꽤나 무거워 보였다. 그에게 무덤에 관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닌 듯했는데 그는 주저했다. 영어를 못한다, 말을 잘 못한다 하던 그에게 현지어로 말해도 된다고 사정했다. 그가 망설인 이유는 언어에 있지 않았다. 그 자리는 그의 형이 묻힌 곳이었다. 독립을 지지했던 그의 형은 인도네시아 독립군에게 죽었다고 했다. 그 뒤로 붉게 타던 노을이 어둠으로 사라졌다.


그를 다시 만나 건 다음 해 4월 부활절 즈음 오에실로에서였다. 그새 초등학교 선생님이 됐고, 우리가 진행하는 평화학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저녁 시간 그의 처소에서 같이 마시던 커피, 그 달콤함이 계속 입가에 남아 있다. 선한 눈망울 그렁그렁 맺힌 눈물 방울을 애써 참으며 그의 형 이야기를 해 주던 착하디 착한 그가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만나며 어떤 미래를 이야기할지, 어떤 과거를 들려줄지 기대하고 있다.


MU는 그날 그 말레랏의 밤, 선생님에게 "인도네시아인으로서 깊이 사과한다"고 말했다. 직접 가해자는 아니었지만,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는 이들에게서 평화의 싹은 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말보다 행동이다. 그게 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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