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완다 대학살을 다룬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필립 고레비치, 강미경 역, 갈라파고스, 2011)를 읽고 있다. 편집자는 책의 부제를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 르완다 대학살’이라고 붙였다. 르완다 인구의 85%인 후투족이 15% 정도에 불과한 투치족을 청소, 100일 동안 인구의 10분의 1인 10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1994년 4월이었다.
저자 필립 고레비치는 이 사건의 시작을 벨기에 식민 통치 시절까지 끌고 올라간다. 벨기에가 착취 지배 구조를 수월하게 완성하기 위해 소수민족인 투치족을 지도자 계급으로 다수민족인 후투족을 노예계급으로 나눈 게 피를 부른 원인이었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이전까진 평화롭게 살던 이들이 서로의 피를 열망한 건 이때부터였다. 제국주의 인간 문명이 지닌 야만이 제노사이드를 부른 셈이다.
개척자들의 출발점은 르완다였다. 르완다의 슬픔은 동티모르의 비극과 닮았다. 티모르섬의 동서 분화는 제국주의 시대 역사로 올라간다. 약 500년 전 포르투갈 함대는 티모르섬을 점령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인도네시아 지역(당시는 수백 개의 소수민족이었다)에 진출한 네덜란드가 티모르섬까지 밀고 들어왔다. 밀리고 밀리던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 티모르섬 절반을 놓고 협상했고, 양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포르투갈은 협정을 맺으며 서티모르 지역의 오에쿠시 지방을 달라고 요구한다. 포르투갈 군인이 처음 정착한 상징적인 장소였다. 이 지역은 인도네시아 점령이 끝나가던 1990년대 후반 가장 잔인한 학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2008년 한 달간의 평화캠프가 끝나고 현지 역사 기행이 시작됐다. 우리들이 처음 밟은 땅이 오에쿠시였다. 동티모르 영토이지만 서티모르 속에 속해 있어서 육로로는 수도인 딜리에 들어갈 수 없다. 꼭 나크로마(Nakroma)라고 하는 배를 타고 움직여야 한다. 현지인들이 섬 속에 섬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지역 언어인 다완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동티모르인들은 보통 떼뚬(동티모르어)과 인도네시아어를 둘 다 사용하는데 이 지역 주민 중 연세가 지긋한 노인들은 인도네시아어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투민(Tumin)이라는 마을 촌장님이 그랬는데, 인도네시아 군과 동티모르 민병대의 학살을 피해 산속 굴에서 생활하다 보니 인도네시아어를 배울 기회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고 한다. (이 일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우노와의 여행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다.)
첫 번째 오에쿠시 여행 일정은 이랬다.
'나빤(Napan, 인도네시아 국경 마을) -> 오에실로(동티모르 국경 마을) -> 꾸테테(Kutete) -> 파사베(Passabe) -> 말레랏(Malerat) -> 투민(Tumin) -> 오에쿠시(kota Oekusi)'
개척자들은 대중교통 이용을 원칙으로 한다. 간혹 태워주겠다는 다른 단체 사람들의 선의를 무시하진 않지만, 우리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 트럭이나 지프를 빌리지 않는다.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현지인을 만나고, 그들의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이렇게 이동하다보니 어려운 게 하나있었는데 ‘여행 도중 밥은 직접 해 먹는다’는 원칙에 따라 11명의 식기구(밥솥, 접시, 컵, 수저 등)를 무겁게 들고 다녀야 한다는 거다. 이후에 동쪽 지방인 라우템 지역 여행 말미에는 심신이 바닥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은 처음 만나는 설렘이 가득했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