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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dire Veritati

전국이 시끄럽다. 어제 오늘 하던 일도 아닌데 갑자기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경북 영주에서 한 학생이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장례식에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숨을 던졌다. 정부는 갑자기 전수 조사 결과를 공개하며 학교 폭력을 근절하겠다고 나섰다. 소위 ‘문제 학교’를 아웃팅하겠다는 이야기다. 언론이나 일선 교사들이 전수 통계 조사 과정의 문제점과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지적했음에도 정부는 통계 자료를 공개했다.

 

추이를 지켜보며 학교 폭력을 대하는 정부의 정책과 우리 사회의 태도는 협박과 망각에 기초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왕따 문제의 근본 해결책이 사랑과 관심이라면 우리의 접근 방식은 얽혀있는 실타래를 풀기보다는 더 비비 꼬아 실마리조차 잡기 힘든 지경으로 몰고 가는 건 아닐까.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이야말로 폭력의 재생산인 셈이다.

 

찬찬히 우리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학교 폭력의 관찰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성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20~30대 대부분은 학교 폭력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였다. 가해자의 범위를 방조자로까지 넓히면 누구도 “내 손은 깨끗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정도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 윗세대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폭력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하며 자신의, 우리의 청소년 청년 시절을 반성해야 한다. 가해자의 죄의식도 좋고, 피해자의 수치도 좋다. 이야기를 꺼내놓고 풀어내야 화해와 치유의 길로 갈 수 있다. 주먹구구식 정책이 아닌 전인격적인 정책, 교사와 학생, 학부모와 교육 기관이 함께 고민하는 해결책이 나오길 바란다.

 

여기 내 경험들을 기록해 둔다.

 

무모했던 일진과의 싸움

 

중학교 2학년. 한 친구와 치고받았다.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별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싸운 듯하다. 짧은 쉬는 시간에 벌어난 일이었지만 사태는 커졌다. 친구가 홧김에 던진 의자가 뒷문을 들이박아 문이 깨지고 말았다. 다음 시간은 도덕 시간. 팔뚝만한 ‘사랑의 매’를 들고 다니던 선생님은 당사자 2명의 엉덩이가 불이 나도록 때렸다. 내가 21대, 친구가 13대를 맞았다. 맞은 매 수가 차이 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오래 버텼고, 그 녀석은 빨리 쓰러졌기 때문이다. 쓰라린 엉덩이를 부여잡고 뚝뚝 떨어지는 아픔의 눈물을 꾹 참으며 우린 쿨하게 화해했다.

 

그러나 우리가 화해했다는 데서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 녀석은 소위 일진이었다. 건들지 말았어야 할 녀석을 건든 거다. 우리가 맺은 평화협정은 일진의 패거리 문화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감히 자기네 사람을 때린 ‘몹쓸 놈’이 누구인지 보겠다며 5~6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예고 없이 날아온 옆차기에 볼을 맞은 후에야 실감했다. 이게 일진이구나. 두려움, 공포라는 단어가 몸에 새겨진 시간이었다.

 

종수. 종수가 아니었다면 남은 중학교 생활을 비루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1~2달 전 일진의 우두머리와 끝까지 싸우며 괴력을 보였던 종수를 건드릴 수 있는 건 학교에선 아무도 없었다. 종수가 나서서 싸움을 말린 덕에 일진과의 분쟁은 거기서 멈췄고, 싸운 친구와도 다시 친하게 지냈다. 1996년 여름이었다. 16년 전이다. 일진이라는 패거리 문화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대규모 근신 사태를 부른 폭력 사건

 

자진 신고해야겠다. 나는 쉽게 화내고 열 받는 편이다. 욱하는 성격 덕에 코 성형수술을 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받은 수술이라 얼마나 높아졌고, 멋있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고1 가을이었다. 고3 선배들이 수능을 100일 정도 앞둔 날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수열을 배우던 때였다. 야간자율학습 중간 20분의 자유시간에 친구들과 농구를 하곤 했다. 농구장 옆 족구장은 늘 선배들 차지였다. ‘쿵’, 날아온 축구공에 머리를 맞았다. 괜찮냐는 물음이 이어져야 정상이었는데, 박장대소가 터졌다. 괜찮냐고 물은 건 친구들이었다. 기분이 상했다. 공을 집어 던지고 교실로 올라간 건 과잉 행동이었다.

 

고3 교실이 뒤집어졌다는 건 2교시 야자가 시작되고야 알았다. 교실로 끌려가 죽도록 맞았다. 멈추지 않는 코를 부여잡고 병원에 도착한 건 9시 30분쯤이었다. 누가 때렸는지, 몇 명이 때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처음 때린 녀석의 니킥으로 코가 주저앉았다는 기억만 선명하다. 1주를 입원하고 한 달가량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구타한 선배들에게는 교내 봉사, 근신, 정학 등의 중징계가 떨어졌다.

 

1주나 학교 안 간 건 좋았지만, 한 달 동안 마스크를 쓰고 다닌 기억은 씁쓸하게 남아있다. 전교생들, 모든 선생님들이 '제가 걔구나' 하고 손가락질 하는 듯했다. 낙인처럼 남은 기억에는 다 이유가 있다. 퇴원하고 학교에서 처음 들은 이야기가 그랬다. "너 잘못도 크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국어 시간, 연세가 지긋해 두꺼운 돋보기를 끼고 있던 선생님이 굳이 교실 앞으로 불러 한 이야기였다. 니킥의 순간과 함께 가장 강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 낙인은 고3들이 졸업하던 다음해 2월까지 계속됐다. 1998년 가을에서 1999년 초까지 계속된 이 기억이 생생한 만큼 두려운 건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왕따와 짝사랑

 

신입생이던 2002년.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선배가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왕따'를 시켰던 경험을 나눴다. 형은 예수와 처음 만나던 날,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같은 반 친구들을 괴롭혔던 사실에 대해 통렬하게 회개했다고 했다. 짧게 이야기했지만 가볍진 않았다. 돌아 나오는 길에 2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번은 방조했고, 한 번은 무시했다. 같은 반 친구가 당하는 왕따에는 신경을 껐고, 중학교부터 알고 지내던 녀석이 고등학교 때 왕따가 되자 난 그 친구의 존재를 무시했다.

 

아니 무시 정도가 아니었다. 면전은 아니었지만 "재수 없어"라는 말과 함께 마른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난 너 싫으니 앞으론 말도 걸지 말라'는 의미였다. 간혹 그 녀석의 반에 놀러가곤 했는데, 큰 헤드폰을 끼고 드럼 스틱으로 비트를 맞추며 노래하던 녀석의 모습을 경멸하곤 했다. 다른 반 아이들은 애써 무시하는 것 같았다.

 

긴 무시의 시간은 고3 10월에 깨졌다. 매점에서 빵을 먹고 나오는데, 녀석이 성큼 성큼 다가왔다. " 너 oo 죽은 거 알아?" 중학교 3학년 남자 셋 여자 셋 같이 모여 여기저기 놀러 다녔는데, 그 중 한 친구가 꽃다운 나이에 하늘로 간 사건 앞에 정신을 놓았다. 몇 번을 되물었고,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에게도 전화해 확인했다. 남몰래 가슴 설레던 시간이 기억났다.

 

어린 나는 좋았던 중3의 기억과 살았어야 할 친구가 죽었다는 괴리감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한참을 방황했다. 마음 한켠에는 내가 그토록 무시하던 친구에게 빚을 졌다는 부채감도 생겼다. 어렴풋이 생각났다. 우리 셋은 짝이었다. 그녀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나와 그 친구가 앉았었다. 그 친구와 많이 친하진 않았지만 내가 그를 무시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비겁했지만, 그녀의 부고를 알려 준 그 친구는 용감했다.

 

눈을 감고 방조하던 왕따 친구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학교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다시 만난 날을 상상하곤 하지만,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여전히 탕감되지 않은 미안함이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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