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난 좀 게으르다. 뭐든 뒤로 미루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보니 꼭 한 발짝씩 늦는다. "세습중산층사회"를 손에 쥔 게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여직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글을 내놓고 있다. 이렇게 성공작이 될 줄 알았으면 진작 느낌이라도 올려놓을 걸.
하지만 느려서 좋은 것도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른 이들의 글을 보다가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게 그렇게 볼 수 있겠구나라는 걸 알면서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독한 부분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진작 내 생각을 올렸었다면 아마도 그 오독은 치명적으로 내 글읽기의 한계를 드러내보이는 흠결이 되었겠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자기위안일지 모르겠지만 게을러서 좋은 면도 없진 않은 듯 하다.
때를 넘겨 잊고 있었다가, 프레시안에 올라온 장석준의 서평을 보게 되었다. 책도 읽을만 하고 이 서평도 읽을만 하다.
프레시안: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세습이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장석준 칼럼에 대해 좀 언급을 해야겠다. 대체적으로 글의 방향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짚어야할 부분이 있다. 우선 그의 서평 시작부분. "작년부터 한국 사회 불평등 문제를 '세대'라는 틀로 설명하거나 진단하려는 시도가 유행하고 있다."라고 장석준은 글을 시작한다. 그는 그 근거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0대 남성'의 지지철회-대열이탈과 조국 사태 이후 각계의 진단을 들고 있다. 아마도 이런 시대적 사조 속에서 세대를 준거로 불평등문제를 거론하는 추세가 강화되었다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불평등문제와 세대문제를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왔다. 시기의 문제를 따지는 것이 얼핏 보면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불평등의 문제를 세대론과 결부시켜 논의해왔던 한 흐름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왔고, 일부에서는 이를 고착화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정치권이었다. 보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꽤 오랫동안 정치권에서는 먹고 살만한 기성세대와 죽고 못사는 청년세대를 대립시키면서 자신들이 청년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식으로 지지를 구했다.
불평등은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의 문제라는 걸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배척당하기까지 했다. 철지난 이념논쟁을 재론하는 구좌파 취급을 받으면서 말이다. 특히 소위 386과 그 이후 세대 간의 대결구도를 만들고 이를 통해 정치적 선명성을 부각받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 계급문제를 거론한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아 취급을 당했다. 이게 우파들만이 그런 게 아니고 소위 좌파들조차도 그러했다. 우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쪽과 친연한 사례로는 변희재의 '실크세대론'이 있겠다. 좌파쪽에서는 특정한 네이밍을 하지 않았으나 N포 세대 문제 등의 문제가 결국 세대 간 격차로 인한 것인냥 포장하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했었다.
그런데 이 지난한 과정이 내포하는 가장 큰 문제는 계급문제를 희석시키거나 부차적 문제로 전락시켜왔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촛불 정국에서도 그렇고 그 이후 문재인 정권의 행보에 대해서도 그렇고 좌파는 좌파다운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민중의 뜻 운운하면서 시류에 휩쓸리기 바빴다. 그러다가 조국 사태가 터진 후 겨우 계급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등장할 뻔했지만 이게 또다시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장석준은 칼럼의 모두에 작년부터 불평등을 세대라는 틀로 설명하려는 측과 그에 대응하여 계급 또는 계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봇물처럼 터진 논의"가 이루어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런 관점은 그동안의 경과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아닌 말로 내가 이 블로그를 비롯해 온갖 도처에다가 세대론은 결코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게 물경 20년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 했지만 시대에 뒤처진 낙오자들의 신세한탄정도로 치부되었고.
책으로 돌아오자면, 나는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인 부분으로 제3장과 제6장을 들고싶다. 총론적 평가와 결론부분 및 그 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장석준의 칼럼을 비롯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으며 대부분 나도 그들의 의견과 다르지 않으므로 더 말을 보탤 필요는 없겠다. 다만, 이 제3장과 제6장은 내 경험과 비교해도 충분히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에 좀 더 살펴본다. 물론 개인적 경험이 자의적 사고를 넘어 객관성을 확보하긴 어렵겠지만, 어차피 이 책에 나온 이야기를 부연하는 수준에 불과하니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라고 보고.
제3장은 대학의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 또는 대학이라고 들어갔지만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노동시장에서도 부수화되거나 심지어 노동시장에 대한 접근조차 제한된다.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되는 거다. 여기엔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는 학력의 세습문제, 지방의 낙후와 소외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지방'은 돈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오늘날 '청년세대'가 가지고 있는 세대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도 이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있었고, 기실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가중되고 있다.
앞에 세대가 어쨌길래? 그래서 연결되는 게 제6장이다. 제6장에서는 현재의 '청년세대'와 구분되는 '장년세대', 즉 현재의 '청년세대'의 아버지뻘이 되는 60년대 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세대에서 역시 대학을 간 자와 못 간자, 서울에 있는 자와 지방에 있는 자의 격차가 있었고, 그 격차 또한 그 이전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오늘날 '청년세대'의 문제와 어떤 부분이 다른가?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이렇게 내놓고 있다.
"A씨와 B씨의 차이는 결국 1980년대에 '대학 진학이 가능했느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갈렸다. 당시에도 대학 진학을 지원할 수 있는지는 그들 부모의 경제력, 즉 계층이 결정하는 문제였다. ... 1960년대생의 노동 생애에서는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서 일하거나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집단에 속하지 않을 경우, '역전'의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185쪽.
내가 다닌 공고에는 머리 좋고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이 수두룩빽빽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들 대부분은 어디 내놔도 머리 나쁘다는 소릴 들을 애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고를 들어왔고 공장으로 흩어졌다. 왜? 가난하니까. 어느 건물 지하 보일러실에 6식구가 월세를 살면서 그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 제대로 잠을 못자 퀭한 눈빛만 남기며 온 가족의 몸이 망가져가던 집구석의 친구놈이 다른 친구놈 집이 있는 판자촌 고개를 올라가면서 야이 판잣집 사는 놈아~!라고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가난했던 놈들이었기에 대학 따위는 꿈도 못 꾸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제 중년이 넘어가는 그들은 인문계고등학교 나와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들어간 다른 친구들이 대기업 정년을 코앞에 두면서 연금을 이야기하고 자식들을 유학보낸 뒷바라지 이야기하는 동안 어떻게 입에 풀칠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걱정한다. 다들 60년대 생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그나마 가방끈을 좀 길게 늘인 편인데, 나 역시도 늦게 진학을 했더니만 진도 따라가기 벅차고 등록금 대느라 정줄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돈나올만한 구멍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 또래들은 이미 졸업을 한 뒤이고, 이것들이 만들어 놓은 네트워크는 그것이 운동권 네트워크든 사업상의 네트워크든 간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는데,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도 이게 이어져서 정치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학교 따라 사람이 갈리고, 운동계열에 따라 계파가 모이는데 나 같은 사람은 낄 자리가 없었다. 그럴 정도니 대학문턱도 가보지 못한 이 세대 일원들에게 '386'이라는 말은 그냥 대학간 놈들끼리 어울리자는 말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고 노회찬 의원이 '386세대'가 아닌 '306세대'의 문제를 거론했던 일이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듯 그 또래에서 '8'자가 빠진 사람들, 이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그냥 그림자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림자일 뿐인 그들의 역할은 그들의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이것은 세대의 문제인가?
이 책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불평등이 '세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제3장과 제6장을 같이 놓고 보자. 이 '세습'의 기원과 과정과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여러 대안들이 있다. 저자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게, 이미 그와 유사한 이야기들을 지난 수십년 간 꾸준히 해왔다. 나도 그렇고 프레시안에 서평 올린 장석준도 그렇고. 그러니 대안에 관한 이야기는 책과 장석준의 서평을 다시 들여다보면 되겠다. 아니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왔는데 왜 안 바뀌는 건가?
조국 사태를 통해 왜 이 대안들이 현실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곱씹어보게 되었다. 조국도 그랬고, 이 땅의 정의를 독식하고 있는 저 '86'들이 그랬듯, 저들도 언젠가는 계급과 평등을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에 안주하면서 그 계급 안에서의 평등을 구가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동류세대 전체를 대표한다. 마치 그 세대 전체가 그들과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듯한 착시효과를 유발하면서 말이다. 진작에 깨졌어야 할 구조가 그 구조를 깨겠다고 나섰던 자들에 의하여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걸 깰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저들 86만이 아니라 저들과 똑같은 양태를 보이고 있는 자들, 소수의 특권층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대표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국익'과 등치시키는 자들의 카르텔을 부술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