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세계'라는 걸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상호 긍정적 반응으로 지속되는 세계라고 보고 싶다. 그런데 오늘날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계의 파괴는 궁극적으로 인간계가 끝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파국적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극단으로 치닫는 격차와 그 격차가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존의 가치가 붕괴되는 과정은 한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격해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을 때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첼시와 그녀의 가족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넓은 현관이 있는 집에서 사는 부유한 백인 가정이다. ... 첼시의 어머니 웬디는 ... 자녀들의 성장과정에 철저하게 관여했다. ... 첼시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적어도 부모 중 한 명은 늘 집에 있었다. ... 첼시의 부모는 해마다 그녀의 생일에 환상적인 주제로 파티를 열어주었다. ... 첼시는 자신이 대학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었다. ...첼시는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로스쿨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42-45쪽)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도중에 그만두었고, 자신의 부친처럼 트럭 운전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정원사와 같은 임시직에 간간이 고용될 뿐이었다. ... 데이비드는 많은 곳으로 옮겨 다니며 지냈다. 아버지가 교도소를 들락날락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아버지의 보호 아래서 자랐다. ... 양어머니에 대해 데이비드는 이렇게 말한다. "미치광이에요, 술에, 약과 마약에 취해 지냈어요." ... 최근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강도 행각으로 구금되었다. ... 학교를 떠난 이후 데이비드는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플라스틱 공장, 조경공사 등 다양한 임시직 일을 해왔다. ... 그는 이런 삶의 경험으로 인해 다양한 피가 섞인 배다른 어린 동생들에게 커다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45-50쪽.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청년에 대한 스케치는 이 책의 주제를 이끌어나기기 위한 출발점이다. 로버트 D. 퍼트넘은 재산, 교육, (가족)관계를 기준으로 구분되는 계층이 혼인, 출산, 양육, 교육, 진로, 이혼 등 생애사의 과정에서 어떻게 격차가 벌어지게 되며 그 격차가 더 커지게 되고 그 결과 각각의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실증적으로 추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격차들이 파괴하는 관계망이 궁극적으로 한 사회를 어떻게 곤란한 지경으로 몰고가는지를 분석한다.
물론 격차를 해소하기 위하여 노력하면 사회적 제 문제들의 일단이 어느 정도 개선의 여지를 가질 수 있음을 여러 연구결과들을 분석하면서 보여준다. 그러면서 퍼트넘은 이러한 문제들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발언의 기회마저도 어느 한쪽이 독점하도록 만들어간다는 것을 확인한다.(341-344쪽)
미국의 사례들을 들어 격차의 대물림 문제가 다음 세대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것이지만, 단지 그러한 경향과 교훈이 미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듯하다. 오늘날 미국에서 반지성주의, 반정치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결국 이러한 격차의 확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 책이 보여주는데,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물론 불평등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결국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우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천년 전부터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이렇게 불평등이라는 것이 사회구성원들이라면 감수해야 할 돌이킬 수 없는 경향처럼 받아들여지는 때에 수천년을 경유하며 공유해 온 저 교훈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퍼트넘은 일찌기 대외정책과 대내정치의 상호관련성에 대하여, 대외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대내정치가 필연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양면게임이론'으로 명성을 얻었다. 공공행정의 연구자인 동시에 정치적 관점에서 주목할만한 이론을 제출하는 그답게 이 책에서 역시 일정한 대안을 제출하고 있다. 제도적으로 즉시 실현할 수 있는 여러 안을 제시하는데, 각각의 안들은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대안들이 실현될 수 있는 실천경로를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이다. 대안에 동의하는 세력들이 정치세력화되어야 할 것이나 현재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인 반동의 경향은 대안의 정치세력화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깃들게 한다. 동시에 격차의 확대경향이 낳고 있는 정치혐오는 정작 목소리를 내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버리게 만들고, 그렇잖아도 과잉대표되는 자들의 목소리를 더욱 키운다. 악순환은 반복된다.
그렇다고 "답이 없다" 이러면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관계가 파괴되고 인간세계가 소멸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