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을 읽은지도 꽤 됐다. 아니, 거의 한 20년을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들에 손을 대지 않았더랬다. 그래서일까 생각은 건조해지고 마음이 거칠어진 듯하다. 어쨌든 나는 역사를 드라마화한, 그것도 여러 인물과 에피소드가 얽히고 설킨 그런 류의 대하소설을 즐기는 편이었다.
김두식 교수의 '법률가들'을 집어 든 건 최근의 사법농단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도대체 한 국가의 사법시스템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는가? 과거에는 외압에 의한 수동적 자기파괴가 사법부를 어떻게 보면 불쌍하게 여길 여지라도 줬건만, 현재 드러나고 있는 이명박근혜 정권 당시 사법부에서 벌어진 이 희안한 일들은 꼭 그런 것도 아닌지라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다. 무엇이 이처럼 오로지 개인적 욕망에 충실한 양승태 류의 사법농단을 가능하게 했을까?
여러 원인에 대한 분석들을 살피던 중, 역사적으로 한국 사법부가 거쳐온 과거에 혹여 그 답이 있을까 싶어 여러 자료를 찾던 중, 마침 김두식 교수가 이 책을 출간했다. 그런지라 처음부터 이 책에 기대를 하진 않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로스쿨 교수가, 사법부에 대해, 그것도 사법부의 인물들에 대해 쓴 책에 대해 재밌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좀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책을 펼친 후, 이건 한 편의 역사대하드라마로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 물론 이 책에 나오는 수도 없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알 도리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인물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따지는 책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미덕은 그 이름도 기억못할 인물들이 몇 년에 어떤 학업과정을 거치고 몇 년 공부해서 무슨 시험에 합격했으며 해방 이후 몇 년에 판사임용이 되었는지를 들여다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아마도 책값이 너무 아까웠으리라.
이 책은 개인이 어떻게 역사라는 파고에 휩쓸리는지, 그리고 여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개인의 한계는 무엇인가? 그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는가? 사법부의 구조가 달리 만들어질 여지는 없었는가? 있었다면 왜 그 가능성을 살리지 못했는가?
한홍구 교수가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반민주적이며 부패한 정권이 어떻게 법률구조를 사유화했는지를 '사법부'라는 책으로 설명한다면, 김두식 교수는 인물들의 개인사가 사건에 휩쓸리면서 구조의 역사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사법부의 한계가 유래한 근원에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물론, 내가 법이라는 분야에 어느 정도 발을 담그고 있어서 이런 후덕한 평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법이나 사법구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독자에게는 인물들의 나열이 너무 복잡하게 여겨지고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점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므로 나는 이 책에 후한 평가를 주는 게 아깝지가 않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상당히 많이 소개되고 있다. 예를 들면, 법조계에서는 성인으로 대접받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일가에 얽힌 일에서는 직위를 이용해 압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이야기("사법부장의 사돈을 수사한 이홍규" 편, 225쪽 이하), 빨갱이 제조기로 악명 높은 오제도가 자신의 과거를 포장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233쪽 이하), 해방직후 일본인 판검사를 배제하고 조선인들로 채우는 과정에서 창씨개명자들의 임용과 관련해 "일본인명으로는 면직사령이 나고, 조선인명으로 다시 임명사령이 난" 일들(184쪽)이라던가, 미군정 하에서 영어 잘하면 대우받는 일들이 사법부에서도 속출했던 에피소드들(202쪽)은 한편으로는 실소를 자아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이 허해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특히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입장과 처신에 따라 파헤쳐 들어간 제4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제5부 '법조프락치' 사건은 또 다른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오늘날 사법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흑역사들을 가감없이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실명에 근거해 과거의 인물들을 소환하고 있다. 언젠가는 여기 열거된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다.
역사적 파고에 휩쓸린 개인이라는 관점이 강조된다면, 개인의 주체성이라든가 저항의 의지라든가 하는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책은 그러한 운명론으로 관점을 이어가지는 않는다. 누구는 알아서 기고, 누구는 저항하고, 누구는 반성하며, 누구는 더 악독하게 변하가는 과정들을 보면서 그런 모든 인물과 사건이 누적된 것이 바로 역사임을 보여준다.
어쩌면 골머리 싸매고 어떤 이론적 결론을 얻기 위해 이 책을 들여다봤다면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치 소설을 읽듯이 책을 훑다보면 흥미진진하기 이를데가 없고, 금방금방 넘어간다. 그런데 아무리 금방금방 넘어갈지라도 사람 이름이 일단 많이 나오면 시간이 걸리는데다가 책의 분량도 적질 않다.(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600페이지 짜리다.)
자료로도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조만간 저자 직강을 들으러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