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정립한 '악의 평범성(banality)'은, 아이히만이 진짜 평범한 공무원이었을 뿐이었는가라는 여러 지적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민을 주는 화두임이 분명하다. 결국 이러한 진부한 악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은 죄'로 규정하게 되지만, 과연 이 죄는 어떤 단죄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궁극에 아이히만은 전범재판 이후 사형되었지만, 만일 이 '생각하지 않은 죄'가 법정형을 받을 수 있는 죄가 될 수 있다면 그 형량은 사형일까? 또는 생각하지 않음에 따라 발생한 결과에 비례할 수 있는가?
천수를 다 누렸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106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은 브룬힐데 폼젤은 끝내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고, 그저 당시의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가 가장 걱정되었던 소시민이었을 뿐이며, 누구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태에 직면해, 폼젤의 구술을 듣고 정리한 토레 D. 한젠은 폼젤의 전 생애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하게 된다. 그것은 '외면'이었다.(282쪽) 그리고 그 '외면'이라는 가장 흔하고 진부하며 '평범'한 태도는, 히틀러 치하에서 고통받던 수많은 민중에 대하여 폼젤이 취했던 그대로 어쩌면 21세기 현재에 우리들의 몸짓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책에서 언급하듯이, 특히 난민에 대한 오늘날 세계 각국의 정부와 해당 국가의 인민들이 보이는 태도들 속에서.
기실, 책을 읽는 동안, 한젠의 평가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폼젤의 구술은 그냥 어쩌면 일종의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한 작은 소녀의 성장과 시대적 굴곡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인생역정을 어쩌면 담담하게, 그러나 중요한 시기마다 극적으로 엮어놓은 그런 이야기. 하지만, 폼젤의 구술을 다 듣고 난 후,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답답한 마음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를 비롯한 광기어린 권력자들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치를 떨게 된다. 반면, 폼젤의 경우처럼 인간은 어디까지 약해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면 그것 또한 불안감을 일으키게 된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폼젤의 시대에, 폼젤과 같은 경우였다면, 나는 폼젤이 아니라 숄 남매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다시금 주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어떤 삶이 주체적인 삶일 것인가? 그것이 반드시 주체적인 삶일까? 인간의 나약함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악해지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시 생각할 일이다. 생각하지 않은 죄는 저지르기 쉽지만, 이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죄는 없겠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결국 주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