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조각들 #소설 #신간 #밀리의서재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당장 달려가 바닥에 나뒹구는 헬멧을 주워들고 재빨리 그의 머리에 덮었씌웠다. 팔다리가 저절로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그 헬멧은 물거품 씨의 몸 일부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마치 영원히 멈추지 못할 달리기를 해야 하는 형벌을 받은 사람처럼, 쓰러진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했다.
-254 p / <빛의 조각들>

밀리의 서재에서 선공개되었던 연여름 작가님의 작품, <빛의 조각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추상적이면서 강렬한 표지가 인상적인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순문학과는 다른 스타일이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단 이 소설의 장르는 SF입니다. 저는 평소 SF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닙니다. 제가 과학 기술에 별로 관심이 없기도 하고, 그런 내용이 소설에 들어가면 조금 어렵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이 소설은 복잡하고 어려운 과학 지식이 없어도 술술 읽힌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만약 SF에 거부감이 있는 분일지라도, ‘과학을 잘 몰라도 읽는 데 부담없는 SF 소설’ 정도로 편하게 읽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뤽셀레는 망막과 시신경을 인공 강화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만들기 위해 소카의 저택에 청소부로 취직합니다. 불의의 사고로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흑백증’을 앓게 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직업인 ‘파일럿’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뤽셀레를 채용한 소카는 실력도 좋고 명성도 널리 알려진 화가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요. 바로 호흡기와 폐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먼 미래이기 때문에, 병이 있으면 대체 할 수 있는 신체 기관을 인공적으로 이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체의 원하는 부위를 자유롭게 기계로 강화하여 살아가는 사람을 ‘인핸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소카의 경우 직업이 화가이기 때문에 인공적인 신체 기관을 이식받을 수 없습니다. 연방 규정상 순수한 신체를 가진 오가닉에게서 탄생한 작품만이 예술로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타고난 신체를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는 ‘오가닉’으로 남아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이 소설에는 소카와 뤽셀레 외에도 소카의 친척, 소카의 저택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실질적으로 소카와 뤽셀레의 이야기가 가장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둘은 각각 신체적인 아픔과 결핍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마음의 상처 역시 깊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아픔과 병은 남들도 알 수 있지만, 마음에 숨겨둔 상처는 본인이 직접 꺼내지 않는 한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소카와 뤽셀레는 서로 마음을 열게 되면서 자신이 어떤 상처를 가지고 살았는지, 그리고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를 서서히 깨달아갑니다.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드는 빛처럼 천천히.
<빛의 조각들>은 총 263쪽으로 분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생각할거리들이 있어서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소설입니다. 처음엔 그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SF소설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가슴이 먹먹한 부분들이 적지 않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이유로 불완전한 너, 나, 우리 그럼에도 마침내 끌어안고 말 자기만의 생에 관하여’ 알고 싶은 독자분들에게 <빛의 조각들>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