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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어떤 의미가 있을까-인문학은 빈곤층의 희망이다-한겨레21 595호

인문학은 빈곤층의 희망이다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배움터인 '클레멘테 코스' 창시한 얼 쇼리스
 "무기력했던 사람이 교육받은 뒤 사회를 바꾸는 '위험한 시민'들로 변하더라"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굳이 할리우드 영화에 비치는 뉴욕의 슬럼가를 상상하지 않더라도, 왜 가난한 사람들은 강퍅한 걸까. 술과 마약, 아동 학대, 습관적 도둑질, 무기력한 폭력 등 지구의 최저점에 다다른 듯한 가난의 바닥에서 그들은 폭력으로 길들여져 폭력으로 인생을 버틴다.

 얼 쇼리스(69)는 빈곤층의 인문학 전도사다. 그는 인문학이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문학으로 성찰한 빈민들이 자립과 자치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실증해 보였다. 그가 창시한 인문학 배움터인 클레멘테 코스는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5개 나라에서 53개 코스가 운영되고 있다.

 경기문화재단과 성공회대 평생학습사회연구소,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가 공동 주최한 '가난한 이들의 희망 수업' 국제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얼 쇼리스가 방한했다. 그는 1972년부터 미국의 진보적 매체인 <하퍼스 매거진>의 편집자로 일해왔으며, 사회비평가·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1월18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 '백만 달러' 교수진의 첫 실험

어떻게 인문학이 빈곤층을 구원할 수 있는가.
△ 얼 쇼리스는 빈곤층의 인문학 전도사다. 인문학은 성찰하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자치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다. (사진/ 박승화 기자)

=가난한 사람들은 폭력의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폭력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다. 하루 끼니를 때우는 것도 바쁜데, 온갖 폭력에 노출돼 대응하느라 더 바쁘다. 그러나 인문학을 통해 성찰적 사고를 배울 수 있다. 폭력의 굴레에서 한발 떨어져 자신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가 있었나.
=11년 전 빈곤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미국의 곳곳을 여행할 때였다. 중범죄를 저지른 여성들을 만나기 위해 한 교도소에 갔다. 문득 나는 한 여성 재소자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가난합니까?" 그녀가 곧바로 대답했다. "우리에게는 시내 중심가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없기 때문이죠." 그들은 책을 읽지도 않았고, 발레나 콘서트를 보러 극장을 가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내가 받은 대학 교육이나 도덕적인 삶은 그들에게 없었다. 그들은 반성적 사고를 갈급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찰적 사고가 없다는 점, 그러니까 대학 교육을 받고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과의 차이가 그거란 말인가. 그렇다면 진정한 평등과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선 그런 차이를 없애야 한다는 말인데.
=그래서 민주주의와 인문학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가설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1995년 사회봉사로 이름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가 출연한 로베르토 클레멘테 가정상담센터에서 첫 인문학 강좌를 시작했다(그래서 강좌의 이름이 클레멘테 코스다). 교수진은 훌륭했다. <뉴욕타임스>의 예술 칼럼니스트 그레이스 글루엑이 예술사를 맡았고,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촘스키와 함께 연구했던 티모시 코랜다가 논리학을 가르쳤다. '백만달러 교수진'이라고 불렸다.

클레멘테 코스는 어떻게 운영되는가.
=일주일에 두 번씩 예술사, 역사, 논리학, 철학, 문학 등 5과목을 배운다. 모두 문화를 관통하는 주제들이다. 따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술사에서는 일상에서 미적인 감상을 끌어내는 방법을 배운다. 논리학은 글쓰기와 관련 있다. 첫 과정에는 노숙인, 미혼모, 이민자 등 가난한 사람들 31명이 참가했다. 강의는 약한 수준의 소크라테스 방식으로 진행됐다.

소크라테스 방식이란 무엇인가.
=클레멘테 코스의 중요한 특징이다. 일단 학생들에게 학습 자료를 읽어오게 한다. 수업 때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학생들은 교수에게 다시 질문한다. 학생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어느 순간 앎에 이르게 된다.


△ 얼 쇼리스와 한국 노숙인의 만남. 소크라테스식으로 인문학 수업을 진행했다. (사진/ 윤운식 기자)

● 그들이 영원히 배고파하는 건 자유

그렇다면 인문학은 사람을 바꿀 수 있나. 어떠한 사람으로 바꾼다는 건가.
=두 가지 종류의 권력이 있다. 하나는 비민주주의적인 강압적 권력, 곧 힘에 의한 권력이라면, 다른 하나는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정당한 권력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일상에서 강압적 권력(폭력)의 지배를 받는다. 그런 폭력의 주요한 형태는 돈이나 문화제국주의다. (테이블 앞의 콜라 잔을 가리키며) 이것을 자주 사먹는 사람들이 빈곤층이다. 그들은 자존감이 없고, 자기 의지를 발현하지 못한다. 클레멘테 코스는 힘에 의한 권력에서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정당한 권력을 갖게 하는 과정이다. 에서 해리티지재단의 보수 인사와 토론한 적이 있다. 그는 인문학이 빈곤층을 절대 바꿀 수 없다고 하더라. 빈곤층은 변화 가능성이 없다는 게 우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걸 증명해 보였다.

무기력한 노숙인들이 바뀌는 사례가 많나.
=10년 동안 클레멘테 코스를 운영하면서 우리는 성공적인 사례를 보아왔다. 멕시코 원주민 1400명이 거주하는 히스토키 마을에서 1997년부터 2년 코스를 운영했다(북중미 대륙은 상당수의 원주민 거주촌이 빈곤층이다). 주민들은 이젠 자랑스럽게 스페인어 대신 마야어를 쓴다. 지역 정치인도 배출했다. 어떤 사람은 교사가 됐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참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위험한 존재'가 됐다. 보라. 일반인은 '위험한 시민'들이다. 투표를 하고 조직을 만들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권력자들이다. 반면 그들은 그러한 '위험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가 위험한 존재가 됨으로써 획득된다.

클레멘테 코스는 또 다른 민주주의의 경로를 암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 필요한 건 빵이 아니냐는.
=물론이다. 하지만 한 조각의 빵을 주면 하루의 배고픔밖에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들이 영원히 배고파하는 건 자유다.

한국형 클레멘테 코스

● 성프란시스대학는 노숙인에게, 광명시민대학은 기초생활 수급권자에게

 얼 쇼리스는 1월20일 서울 중구 정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세미나실에서 노숙인들을 만나 클레멘테 코스의 교사로 나섰다. 노숙인들은 30여 쪽짜리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 왔다. 쇼리스는 소크라테스적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2005년 10월 현재 전국적으로 4698명의 노숙인이 있다. 노숙인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먹을거리이지만, 그들이 시민사회의 공동체로 안착하려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준비하고 추진해나갈 수 있는 근원적인 능력이나 힘을 키워야 한다.

 성공회대가 운영하는 성프란시스대학은 노숙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형 클레멘테 코스다. 2005년 9월20일 첫 입학식을 연 뒤 12월10일 가을학기를 마쳤다. 20명 중 17명이 이번 과정을 수료했는데, 석 달 동안 유의미한 변화를 얻었다. 임영인 노숙자다시서기센터 소장은 보고서에서 "학생들은 무료 급식 대신 일주일에 몇 끼라도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거나 매식을 하기 시작했고, 청결을 위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자존감의 회복이다. "내가 원하는 이상이 높아져 내가 처한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 "난 이 세상과 가까이 갈 수 있고, 갈 수 있는 희망을 찾았다고 생각한다"는 학생들의 소감을 들으면, 이제 그들 스스로 길 찾기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광명시평생학습원이 운영하는 광명시민대학에서도 2005년 인문학 강좌가 운영됐다. 16명의 기초생활 수급권자가 창업 강좌와 더불어 '동양고전을 통한 삶읽기'라는 과목을 수강했다. 보고서 작성을 위한 인터뷰를 한 결과, 대부분의 학생들은 높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2006년01월25일 제595호

http://h21.hani.co.kr/section-021014000/2006/01/0210140002006012505950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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