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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가벼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무래도 내 글은 너무 무겁다. 하루키 데뷔작을 한장한장 뜯어서 글이 안 풀릴 때마다 한장씩 읽는다. 이렇게 보니까 힘의 안배를 굉장히 잘한 소설이다. 그리고 다시, 유희열을 읽는다. 가벼워지고 싶어서.


  많은 부분을 유희열에게 배웠다. 열일곱 살 무렵에 잠들지 않고 누군가의 라디오를 들으면 그렇게 된다. 대학에 가서는 유희열을 좋아하는 여자애를 잡아다가(!) 평생의 친구로 삼았다. 그애가 아주 오랜만에 놀러왔고, 나는 유희열의 새 책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애는 자꾸만 들뢰즈 얘기를 했다. 우리 자매를 앉혀놓고 요즘 공부하는 들뢰즈의 개념들을 주욱주욱 설명하다가 "애벌레 자아"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내가 아무리 예전에 들뢰즈 극성팬이었어도 이거는 선 넘었다 싶어서 아무 말 없이 방에 들어와서 잤다. 내 동생은 팔자에도 없는 들뢰즈 타령을 오절까지 듣고 다음 날 나한테 욕 카톡을 보냈다. "죽여 진짜. 니 친구는 니가 놀아줘."


  내 동생은 요즘 자꾸 나한테 니라고 부른다. 너 왜 자꾸 나한테 니라고 하냐. 이렇게 물으면 언니는 풀네임이고 니가 이름이라서 그렇게 부른단다. 내 동생은 요즘 자꾸 나한테 야라고 부르는데, 니가 이름이라며 왜 야라고 부르냐고 물어보면 또 이렇게 말한다. 생각해보니까 언니야가 풀네임인데 길어서 야라고 한다고. 


  그러다가도 벌레만 나오면 언니님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언니님 벌레 좀 잡아주세요, 라고 한다. 나도 벌레를 무서워하지만 내 동생은 진짜 무서워하니까 벌벌 떨면서 내가 잡는데, 약간 존경이 더 필요하다고 갖은 유세를 떨면서 잡는다. 그럼 저번에 내가 요즘 쓰레기 같이 산다고 말해서 미안했어. 언니가 그렇게 살아도 큰 의미에서는 존경한다고 했던 말 취소해 좁은 의미로도 존경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해. 이렇게 존경 타령을 들으면서 힘내서 벌레를 잡는다. 


  아무리 미리 방역을 해도 여름엔 밖에서 들어오는 벌레가 가끔 있고, 내 동생이 야라고 하는 날들이 이어지는 걸 보니 벌레가 한번쯤 또 나와도 좋겠다고 가끔 생각한다. 벌레 공포증이 부모에 대한 분노라는데, 나도 이렇게 벌레가 싫은데 내 동생은 얼마나 벌레가 무서울까 생각하면 뭐 나쁘지 않은 일이다. 좀처럼 세우기 어려운 "가오"도 세울 수 있고.


  다시 유희열 얘기. 승희는 책 몇 장을 들춰보더니 유희열이 이제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도 책 처음에 받았을 땐 그랬다고 대답했다. 다 읽고 나니까 그게 유희열이라고 생각했다고도 말했다. 더 길게 쓸 이유가 없어서 그렇게 쓴 거라고. 그 책은 승희가 집에 갈 때 가져갔다. 책이 임자를 찾았다. 언젠가 들뢰즈의 개념들 사이에서 헤매다가 머리가 지끈거릴 때, 넘겨보고 싶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들뢰즈 정도의 자극이 필요할 정도면 논문이 졸라 안 풀린다는 뜻이니까 그녀의 공부에 좋은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승희가 가져다준 왕 크고 아름다운 왕가위 감독의 책을 읽어야겠다.


  막상 유희열 얘기는 못해서 다시 유희열 얘기를 한다. 나는 유희열이 잿빛 옷을 아래 위로 맞춰 입은 다음에 뜬금 없이 분홍색 스니커즈를 신은 사진이 되게 좋았다. 그것도 좋은 동네에 갈 때 힘준 거라는 게 귀여웠다. 50이 되어도 유희열은 유희열을 산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나이를 먹을 수록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게 다 톤의 문제다. 어떤 톤으로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 이번에도 또 배운다. 나는 여전히 유희열을 좋아하는 것 같다. 승희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건 승희 마음이니까 욕심내지 않는다. 


  오늘의 "밤을 걷는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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