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베스트 : 마이클 코넬리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돌아온 '회장님' 마이클 코넬리의 법정 스릴러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가 나름대로 치열한 경합을 통해 선정되었다. 동작가의 작품 중 <시인>이 독자들에게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것 같지만, 내게는 세상과 타협한 장사꾼 변호사 '미키 할러'의 매력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과정이야 어쨌든 마무리가 얼추 예상이 되는 일반적인 스릴러 소설들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법정에서의 결말은 주인공이 이 얽힌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독자의 예측을 불허한다.
연초에 읽었던 탓에 기억이 희미해져, 연말과 새해 벽두에 걸쳐 읽었던 <스몰 플레인스의 성녀>가 더 강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중반에 국내에 소개되었다가 쓴맛을 보고 10년이 훌쩍 넘은 후 다시 돌아와 장르 소설 독자들에게 "마이클 코넬리"라는 이름을 각인케 한 선봉작으로서의 의미도 있고, <시인>, <실종>등 작가의 다른 수작들 역시 무척 좋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베스트로 선정하였다. '미키 할러'가 등장하는 후속작도 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잔뜩 기대해 본다.
서스펜스 스릴러 부문 : 스콧 스미스 <심플 플랜>
가장 손에 땀을 쥐고 정신없이 읽은 책이라면 단연 이것이다. 이미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흔하고 평범한 소재와 전개,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지만, 주인공을 독자에 감정이입 시키는 것에 완전히 성공한 것 같다. 이런 내용의 소설들이 흔히 그렇듯 사건은 파국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절망적인 사건들을 연달아 힘겹게 맞이해야 한다. 소설은 인간의 도덕심이 얼마나 위태롭고 무력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태의 심각성 만큼이나 소설을 읽어나가는 가속도도 비례하여 결말을 만나기 전까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진정한 페이지 터너.
<소녀의 무덤>이 못지 않게 좋았지만, 너무 돌연한 결말부분의 액션이 조금 아쉬워서 <심플 플랜>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전 미스터리 부문 : 존 딕슨 카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황금기의 추리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약간의 나른함과 느슨함.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 편의 연극을 관람하는 듯한 느낌. 오컬트 요소가 빠져있는 딕슨 카의 소설도 이런 느낌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특히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은 사건 관계자 세 명의 진술로 사건을 간접 체험한다는 점에서 더욱 독자의 방관자적 관점이 강화되는 소설이다. 이불 뒤집어 쓰고 귤 까먹으며 겨울밤을 함께 보내기에 이 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 더구나 그 연극이 흥미진진하기까지 하다면 말이다.
하드보일드 부문 : 조지 펠레카노스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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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고 와일드하다. 흑인 탐정 데릭 스트레인지의 소심한 듯 신중한 성격도 좋지만 소설의 재미를 크게 높여주는 것은 전직 백인 경찰 테리 퀸의 캐릭터다. 선과 악이 묘하게 공존한다고 해야할까? 내 짧은 필설로는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고 경험해달라고 할 밖에.
그리스 이민자의 후손인 작가가 흑백 갈등을 정면으로 다룬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의 묘사, 거침없는 욕설. 결코 챈들러 처럼 우아하거나 맥도널드 처럼 사색적이지 않다. 이 소설의 좌표는 로렌스 블록과 미키 스필레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쌈마이적인 버디 무비의 내용을 따르고 있지만, 싸구려스럽지는 않다. 캐릭터의 힘이다. 뒤늦게서야 스트레인지 탐정을 만난것이 아쉬울 뿐이다.
일본 미스터리 부문 : 요코미조 세이시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장르소설 독자들에게 시리즈는 중독이다. 그 작가의 그 탐정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함, 익숙한 구성, 낯익은 문체. 너무 자주 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감질나지도 않는 기간 1년에 한 번 씩 돌아오는 사나이 긴다이치 고스케(최근 <밤산책>의 출간으로 매년 여름 시리즈 출간의 불문율이 깨지긴 했지만). 다시 돌아와서 반갑고, 재밌으니 좋다. 긴다이치 시리즈는 현대 일본의 신 본격 작품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전만의 향기가 살아 있다. 눈에 띄는 명문名文은 아니지만 힘있고 고풍스러운 문장도 긴다이치 시리즈만의 확실한 매력이다.
단편집 부문 : 요코야마 히데오 <제 3의 시효>
경찰소설의 달인 요코야마 히데오. 경시청 강력 1, 2, 3반의 개성넘치고 판이한 스타일의 반장들과 그들이 해결하는 사건들을 다룬 연작 단편집이다. 감동 강박증이라는 냉소적인 평가도 받는 작가지만, 이 단편집에서는 크게 오버하지 않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준다. 수록되어 있는 각각의 단편들도 어느 하나 쳐지는 것 없이 고른 수준을 보여준다.
비非 미스터리 부문
제임스 P. 호건 <별의 계승자>
체제 경쟁이기도 했던 우주 개발은 사회주의권의 몰락, 천문학적인 투자에 대한 실효성 문제 등으로 강대국의 관심에서 밀려났다. 2010년임에도 아직 인류는 화성에 발자국을 찍지도 못하였으며, 달에 기지 하나 세우지 못한 상태이다.
이 책은 1970년 대 씌여진 2020년 대 배경의 하드 SF 소설이다.
우주 개발이 정점에 달해 있던 시기인 터라 2020년 지구의 우주 과학은 목성에 유인 우주선이 다닐 정도까지 발달 해 있다. 달에서 발견된 5만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 사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토론과 추론을 거듭하는데, 결국 인류 근원의 미스터리에 도달하게 된다.
흥미를 자아내는 소재와 미스터리 소설을 방불케 하는 전개, 화끈한 가설 등 SF 소설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렇게 재밌고 수상 경력도 화려한 소설이 발표한지 30년이 넘어서야 국내 출간이 이루어질 만큼 열악한 우리나라의 SF 시장이 아쉬울 따름.
이사카 코타로 <골든 슬럼버>
뒤섞인 시간대 서술, 능수능란한 복선 처리, 암울한 상황에도 쾌활함을 잃지 않는 등장인물들, 산뜻한 마무리. 이사카 코타로의 전매특허들이 유감없이 발휘된 소설이다. 나와 동갑인 이 작가(예전에는 이 말이 젊은 작가라는 말에 다름아니었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다.)는 참 '재기발랄'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것 같다. 혹자는 너무 가볍고 통통 튀기만 한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작가와 코드가 잘 맞는다. 최근에 나온 <글래스호퍼>를 제외한 국내 출간작 전부를 다 읽었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기존의 작품들에 비하면 블록버스터라 할 만큼 장대한(?) 스케일과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 소설은 내가 읽은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들 중 최상위 레벨을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단, 비교적 최근작인 <마왕>, <골든 슬럼버>, <모던타임즈> 등의 작품들에서 작가가 말하고 있는 주제, 혹은 세상에 대한 시각들에 대해서는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