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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아줌마의 게으른 책읽기
  • 체실 비치에서
  • 이언 매큐언
  • 8,550원 (10%470)
  • 2008-03-25
  • : 1,556

20대 초반의 남녀가 예쁜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첫날밤, 그들은 싸우고 헤어졌다... 이처럼 간단한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전혀 단순하지 않다. 이언 맥큐언이기 때문이겠지? <속죄>를 참 아프게 읽었는데, 이 책도 참 아프다. 사랑과 성, 지금의 한 여자와 한 남자를 만들어낸 과거들...에 대한 상념들이 이어진다.

 

성적인 경험이 없는 남녀가 만나 첫날밤을 치르면,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확률이 매우 크다. 성적인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 일방적이면 안 되는, 서로를 알아가야 하고 맞춰가야 하는, 어렵고도 섬세한 상황이므로. 육체적 경험도 없지만, 그에 대한 정보조차도 너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그 밤을 맞이했다. 백프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걸 당연한 거라 여기고 시행착오를 교훈 삼아 다시 노력했어야 했지만, 그들은 바로 파국을 맞이하고야 만다.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에는 현재의 그들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그동안의 가족들과의 관계와 삶의 경험들이 함께 그들과 그 침대에 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지금 그들의 말과 행동을 낳은 것이라고.

 

정신착란을 갖고 있는 어머니를 침묵속에서 보호해야 했던 에드워드는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있었다. 거기에다 자신의 폭력성과 관련해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했던 그는 첫날밤에 자신감이 없었다. 자칫 잘못해서 모든 것을 망쳐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에드워드보다는 경제적으로 풍요했던 플로렌스는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던 어머니와, 이상하고도 미묘한 아버지와의 관계 사이에서 불안함을 갖고 있다. 아버지와 플로렌스 사이에는 뭔가 복잡한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깊은 스킨십을 두려워할 만하게 한 어떤 경험이 그들 부녀 사이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만을 하게 할 뿐이다. 플로렌스의 의식에서마저도 지워져버린 어떤 일들...

 

사랑받고 싶음, 공격성, 욕망 같은 것들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고 억눌러야만 했던 두 사람이 만났다. 사랑을 했고, 사랑이 그들을 해방시키는 듯했다. 그래서 결혼도 했지만... 20여년간 다른 경험을 가진 불안한 두 영혼이 만나 처음부터 잘 맞아떨어지기란 당연히 어렵다. 이게 현실이고,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작가는 드러낸다. 첫날밤은 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만큼 상대를 배려하고 기다리고 마음을 여느냐에 달려 있다.

 

플로렌스는 성적인 것에 아예 무감각한 불감증 환자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욕구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것을 이끌어내게 도와줄 정보와 경험이 그들 사이에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서툴러서 벌어진 결과 앞에서 진지한 대화와 사과와 격려가 조금 더 있었더라면, 충분히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커플이었다.

 

물론 그들이 첫날밤을 잘 치렀더라도, 그 후로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때를 현명하게 넘겼더라면 행복한 미래를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에드워드의 늦은 후회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일지도 모른다. 살다가 몇 년 후에 심하게 싸우고 서로를 원수 보듯 하다 헤어졌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감히, 그 미련과 후회와 안타까움마저 집어치우라고 할 수는 없다.

 

연애를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달콤한 연애소설이 그들에게는 더 끌리겠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아픔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스런 에드워드와 플로렌스가 나중에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루는 소설을 완성하고 싶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는 그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제 그는 그녀의 자기희생적인 제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쭉 뻗은 광활한 자갈밭 길의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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