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의 주인공은 온갖 불행을 다 가지고 있다. 불행한 청소년이 그걸 극복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주변 어른이나 친구에게서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나올 때 가장 힘이 센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현실은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게 문제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기만의 세계를 ‘리을’이라고 부른다. 그 정체는 남들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랭보’라는 시인의 시들이었다. 온 마음을 다할 때 가능해지는 공중 부양이었다. 남들은 모르는 도서관의 구석진 공간이었다. 좋아하는 남자아이였다. 물론 이 이야기는 다른 청소년 소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해피엔딩이 아니다. 어쩌면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불행의 조건을 많이 짊어진 어린 사람들이 행복해지려면 환경이 바뀌거나 좋은 어른이 생겨야지 그들 자신의 힘만으로 그걸 이겨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 소설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공중 부양’ 따위의 판타지로 극복하려는 매우 어리석고 유약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런데 독자가 ‘뭐야, 이 판타지와 현실의 복합은?’ 이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그 판타지가 누구나 마음속에 갖고 있는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힘들 때 그걸 이겨낼 수 있는 무엇이 있긴 했다. 가령 마키아벨리가 그랬듯 고단한 하루와 세파에 시달리다가도 잠들기 전 30분만이라도 나만의 독서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그걸 견뎌낸다거나, 음악을 들으며 어설픈 그림을 끄적이며 그림 속 세계에 내가 사는 듯 착각을 한다거나, 꿈의 긴 여정 속에서 낯선 세계를 만난다거나.
도서관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는 매우 공감이 된다. 나도 책을 좋아하는 청소년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리 학교에도 도서관을 안락하게 여기며 거기서 성장을 꿈꾸는 소년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일반적으로 청소년들이 책을 좋아하는 일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책이나 도서관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가 다른 청소년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으려나 걱정이 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끝부분에서 울컥했노라 고백한다. 무엇이 나를 건드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10대를 위한 소설에 60대가 감동했다는 말씀 전하노니, 작가, 건필하시라. 그리고 그대의 리을도 굳건한 세상이기를 기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