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 생각의 요새
  • 고명섭
  • 23,400원 (10%1,300)
  • 2023-08-09
  • : 376


이 책은 철학책이다. 아니, 철학책들의 서평집이다. 요약서라고 해야 하나? 놀라운 건은 플라톤에서 불교, 도덕경, 페미니즘까지 아우르지만 내용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즉 저자의 의견을 별로 담지 않은 듯 보이면서도), 주요한 내용을 건너뛰지 않으면서도 아주 쉽게 읽힌다는 것. 이토록 방대한 양(100권이 넘는 책)을 다루고 있는데 이 엄청난 지식을 단 한 권에 담은 것을 보면 책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동안 어마무시한 양의 책을 읽고 쓴 저자는 이제 자신만의 무언가를 구축할 때가 되었다. 아직 그러지 않는 이유가 고명섭의 기질 때문인지, 겸손한 탓인 건지, 아님 정말 독서와 글쓰기, 딱 거기까지만으로 자족하는 건지 모르겠다. 애독자로서 나는 그만의 저서를 기다린다. 요약이나 정리, 해설이 아닌.

마키아벨리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 사람이다. 그래도 <군주론>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은 있다. 공감해서라기보다 ‘문제적’이라서.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는 사마천이나 플라톤, 단테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이 역작을 남길 수 있었던 근거로 그들이 맞닥뜨렸던 고난과 시련을 꼽는다. 일개 범인인 나로서는 시련을 겪고 역작을 쓰기보다 사랑도 명예로 이름도 남기지 않더라도 평온하게 아무 일 없이, 남들만큼만 살았으면 하는 욕망이 강하다. 그래도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곤고한 생활을 고백하며 했던 다음 이야기는 깊은 감명을 준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체력을 넘는 직장생활과 육아, 살림, 고단함과 그리움을 다 이겨내고 내가 살아낼 수 있었던 힘 역시 모든 것을 마치고 침대에서 넘겼던 책장, 그 밤들의 독서였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에 읽을 수 있었던 책 몇 줄, 일기 몇 줄이 나를 살게 했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이루고 성공의 발판으로 삼지 못했다 해도 그저 나는 그것으로써 살아낼 수 있었다.

 

"저녁에 오면 문 앞에서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고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지. 우아하게 성장을 하고는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는 고대인의 옛 궁전으로 들어가,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이유이자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음식을 맛보면서 그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던가를 물어본다네.... 이 네 시간 동안만은 나에게 아무런 고민도 없다네... 쪼들리는 생활도, 나아가 죽음까지도 나를 두렵게 하지는 못하네.”

 

읽어본 적도 없고 다만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라고만 알고 있는 이지만 하이데거가 그랬단다. "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잠든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 고. 어떤 맥락에서 한 말인지 모르지만 무릎을 칠 만한 말이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자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다. 내란의 시대를 살아내면서, 신념의 다름으로 가족 간의 거리마저 멀어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서 수많은 ‘잠든 척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겠지. 나 역시 나 자신의 생각을 ‘사상이고 철학이며 신념’이라고 자신할 만한 통찰력은 없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학습도 성찰도 없이 맹목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많은 위험한 인물들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어쩌면 정말 무서운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척하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나에겐 고명섭이 좋은 친구가 된다. 세상 모든 철학을 읽는다고 해서 올바른 통찰의 힘을 얻을 수 있으랴만 그래도 이렇게 쉽고도 재미있게 세상과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 친구가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독선에 빠지진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명섭은 말한다. ‘자기 내부가 한없이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고서는 자기를 둘러싼 시대의 가난을 볼 수 없고, 그 가난을 볼 수 없으면 가난을 이겨내려는 투지를 불러일으킬 수 없다(원효, 수운,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 말하여)’고. 나의 가난하고 핍진한 영혼은 낮은 곳에서 하염없이 스스로를 성찰한다, 나 자신의 부족함에 대하여. 주변에 널리고 널린 아픈 사람들에 대하여 고통스러울 만큼 많이 자주 생각한다. 답은 보이지 않더라도 좀 넓게 볼 줄 알았던 사람들의 말과 글을 읽으며 하염없이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덜 틀린 길로 가려고.

 

모르는 영역인데 관심 있게 읽은 이는 엘렌 식수다.

엘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를 페미니즘의 실천 전략으로 제시했단다. 페미니즘 운동의 처음은 글쓰기였을지도 모른다. 작고 미약한 일처럼 보이지만 생존 그 자체가 투쟁에 가까웠던 시절, 여성 작가는 존재하기 힘들었던 시절부터 글쓰기 그 자체를 투쟁으로 해온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는 작가는 리베카 솔닛이나 정희진 정도이지만,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글을 써왔는지 알고 있기에 ‘고작 글쓰기’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엘렌 식수가 보기에 세익스피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같은 이들은 남성이지만 자기 안에서 타자, 곧 여성성을 발견해 회복한 사람들이란다. 여성적 글쓰기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인간으로 해방하는 실천적 행위라면서.

20대인 딸내미가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처음엔 여성의 삶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고.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여성의 삶을 말하는 것은 기후 위기, 환경 문제, 약자 인권, 이주민 이슈, 심지어 동물권까지 연결되더란다. 부분만을 보지 않고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태도가 될 때 그 사유를 우리는 성찰, 나아가 철학이라고 부른다. 글쓰기에서 시작한 페미니즘적 관점은 결국 인권에 대한 고뇌로 나아가고 권력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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