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기억할 것도, 인상적인 것도 너무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책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고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본 이야기지만) <혼모노>를 여러 계간지에 보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 최근에 나도 청소년에게 읽힐 계엄 소설을 썼지만 몇몇 출판사에서 연락도 못 받고 조금은 의기소침해 있었기 때문이다. 출판 방향이 안 맞을 수도 있지 뭐, 싶다가도 정말 재미있었으면 출판사에서 먼저 놓치지 않으려 연락을 했겠지 싶어 마음이 섭섭한 와중에, 와, 성해나 소설처럼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도 퇴짜를 맞는다고? 하면서 조금은 위로를 받는다. 뛰어난 예술가들에게도 거절당한 기억들은 많고 많다. 유명한 연예인들에게도 바닥을 헤매던 시절들은 있다. 그러니 상처받을 일이 아니라 힘을 더 낼 일이다.
하지만 성해나의 소설은 그런 작은 에피소드가 아니라 소설 그 자체로서 오래 기억할 만한 작품이 많다. 90년대 소설 이후 한국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오해는 마시라, 직업적 이유로 청소년 소설은 거의 섭렵한다)는 넷플릭스보다 재미있다는 그의 소설이 좀 궁금하면서도 ‘재미있어 봤자겠지’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아니었다.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이런 이야기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싶은 마음에 놀라고 있다. 아니, 소재야 세상 사는 모든 이야기가 소설이 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는 데 놀란다.
한마디로 그의 소설은 ‘독자에게 스며든다.’
특별히 뛰어난 문장이나 독특한 문체도 아니고 엄청나게 자극적인 사건이나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제일 처음 읽은 ‘길티 클럽’의 경우 한 영화 감독에 대한 덕질에서 묘한 정서적 긴장을 느껴 계속 읽게 되었다. 뭐 엄청난 반전(가령 그 멋진 감독의 악인성이 드러난다든지 평범하게만 보였던 화자에게서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오류로 인한 범죄 같은 것이 벌어진다든지)같은 게 있으려나, 하는, 분위기의 미묘함. 그런데 딱히 그런 건 없었다. 오히려 독자들은 김곤 감독이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는 서술자의 모습에서 기괴함을 느껴야 한다. 이건 뭐지? 우리가 흔히 아는 ‘정치적 올바름’, ‘과정의 정당성’, ‘진실성’을 대하는 태도와 사뭇 다르다.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위상이 중요한 걸까? 도덕성을 웃도는 예술가만의 태도와 아우라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범죄나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을 서술자는, 그리고 작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에 비유한 것일까?
그러다가 <구의 집>을 읽으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94년 생이란다, 작가 성해나는. 우리 세대(85학번이다)조차도 이제 시대의 끝물로 경험한 고문과 취조의 현장을 설계한 건축가 이야기이다. 고문의 생생한 현장을 그린 것도 아닌데 그 현장을 끌려가 본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 소설. 한 평범한 건축학도가 악마로 변해가는 과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스며든다’. 그러고 보니 다른 작품들도 이렇게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인물들에 스며들고 이야기에 젖어들게 된다. 그가 옳은 자인가 나쁜 놈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을 읽다가 문득 관찰자가 되어 주인공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거리가 가깝다가 멀어졌다 한다. 어느 한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거나, 내가 그인 듯 느껴지는 그런 소설은 없다. <혼모노>도 박수 문수가 주인공이고 서술자인 것 같지만 독자인 내가 그 맘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등장인물들, 그렇다고 아주 생뚱맞기만 한 인물도 아닌 그들, 도대체 그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걸까? 의아하다가 종내 이해가 된다. 그들이 추구한 진실 혹은 삶의 지향이 비록 일그러졌더라도 거기 있긴 했나 보다, 하고. 가령 <우호적 감정> 같은 소설은 누구나 저마다의 입장을 갖고 해내는 직장 생활 혹은 집단 생활에서 딱히 누구를 나쁘다고 말하기 뭐한 ‘나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서술자처럼 ‘어리둥절하다’ 저 사람 나쁜 사람이었네? 그럼 내가 베푼 호의는 뭐가 되지? 아닌가? 그는 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어떤 입장이 있는 건가? 세상은 다 그런 건가? 그저 이것은 그저 ‘갈등’에 불과한 걸까? 하긴, 우리의 일상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기보다 갈등의 연속이니까. 그리고 흔히 우유부단하거나 유연하거나 우호적이거나 다정한 사람들은 거기서 길을 잃고 어리둥절해지니까. 그 단계를 벗어나면 영악해지거나 강해지거나 악해지기도 하지만 또 그렇게 평생 살아가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의 소설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자아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90년대 자기 과잉의 한국 소설에 대한 약간의 경멸 때문에 떠났던 자리로 돌아가, 내가 모르는 세상을 접하는 또 하나의 대문으로서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열심히 읽어보기로 결심한다. 나이 든 작가는 왜 아니냐고? 이전에 읽었던 세대를 벗어나 이제는 나의 자녀뻘인 젊은이들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해나처럼 나이가 많지 않아도 그 이전 세상에 대해 ‘작가의 눈’으로 짚어낼 수 있는 작가들이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각성했기에 ‘늬들이 80년대를 알아?’ 식의 꼰대 마인드를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세상에는 한계가 있다. 그걸 뛰어넘는 것은 더 많은 경험이나 공부/ 독서 혹은 인터넷 검색이 아닌 것 같다. 감각과 통찰, 그리고 진부하지만 상상력, 그것이 없으면 문학은 안 된다. 지성이나 인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세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