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저 재미로. 아니, 힐링용으로.
목표가 없는 공부는 느리다. 그래서 좋다. 잘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재미있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단점도 있다. 속도가 안 난다. 2년 가까이 되지만 별로 실력이 좋아지지 않았다.
목표가 없었지만 굳이 왜 공부를 하는가 자문하며, 언젠가 스페인어로 된 동화책 정도를 읽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좋겠다 싶어졌다. 첫 페이지를 읽다 말곤 했지만 스페인어 <모모>,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그리고 네루다의 시집도 사 놓았다.
최근에 꿈과 계엄에 대한 소설을 한 편 썼다. 처음부터 계엄 이야기를 쓸 생각은 없었다. 꿈이 잦은 내가, 꿈의 미스테리를 풀고 싶어 온갖 심리학, 뇌과학 책을 섭렵하던 내가 소설 속에 내 꿈들을 담으려다 문득 라틴 문학의 ‘마술적 사실주의’가 떠올랐다. 꿈은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니 그야말로 마술적 사실주의적 글쓰기 기법에 딱 적합한 소재 아닌가. 물론 21세기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라틴식 마술적 사실주의는 너무나 걸맞지 않은 사조이다. 다만 판타지 문학이 판을 치는, 특히 청소년 소설계에서라면 마술적 사실주의에서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미친다.
그렇게 집어 든 라틴문학 단편집이 바로 이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이다. 어쩌다 보니 청소년 소설 외에는 한국 소설을 읽지 않은 세월이 길어진 내가 시대와 공간이 먼 라틴 문학을 읽는다는 괴리감이 있다. 유명 작품 위주로 읽다 보니 아주 가까운 현대 스페인어권 문학은 어떨까 궁금하긴 하다. 그래도 아주 좋은 충격이었다. 전혀 다른 구조와 발상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전에 읽었던 보르헤스를 다시 집어든다. 이익과 목표와는 무관한 이런 독서, 진공 상태의 독서의 세계로 나는 서서히 접어들고 있다. 이러면서 늙어가겠지. 아직은 쓸모가 있는 회화, 쓸모가 있는 독서, 생산적인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아주 다 사라진 건 아니지만 또 한 편 이렇게 서서히 가라앉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아닌가? 한 열네 살부터 그런 알 수 없는 시공간/혹은 상태를 꿈꾸었던 것도 같은데?
사회적 사실주의 문학을 구현했다고 하는 이그나시오 알데꼬아 <영 산체스> 에서는 교과서에서 배운 1920년대 리얼리즘 문학이 떠오른다. 냄새로 그 현장을 느끼게 하는 솜씨를 보라.
오후에는 후텁지근하고 궂은 날씨였다. 들판에서 곡식 향기가 풍겨왔다. 하수도 냄새가 났다. 기관차의 증기 냄새가 났다. 길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약간의 땀 냄새를 풍겼다. 또 식료품 창고처럼 어두침침하고 희게 색칠된 옷장 어딘가에서 무미건조한 석회 냄새를 먹은 옷 냄새가 났다. 나들이옷 차림으로 도시에 올라온 농사꾼 냄새가 났다. ...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은 한 남자의 죽음을 역순으로 거스르는 기법이 돋보인다. 이 책 속 작품의 공통점은 독특한 기법만이 아니라 섬세한 묘사와 시적인 표현이 감성을 사로잡는다는 것.
새들은 깃털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알로 돌아갔다. 물고기들은 연못 바닥에 비늘의 강설을 남기로 알로 응결되었다. 야자나무는 부채를 접듯 갈라진 잎을 접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줄기들은 잎사귀들을 다시 빨아들였고, 대지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회수했다.
훌리오 꼬르따사르 <드러누운 밤>은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누운 주인공이 꿈속에서 스페인 정복 이전 시대의 원주민이 되어 정글에서 도망가는 자신과 뒤섞이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결국 병상과 아스테카 제단에서 이중으로 주인공이 죽게 되는 이야기인데 이 역시 문장이 예술이다, 자연스럽게 두 세계가 섞이는데 여기가 어디라, 설명이 없이 자연스럽게 공간이 바뀐다.
(병실에서) 손은 물병에 닿지 않았고 그의 손가락들은 다시 캄캄해진 텅 빈 공간을 움켜쥐었다. 통로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위가 한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돌연 붉은 섬광이 번쩍이곤 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누워서 힘없이 신음소리를 냈다. 천장이 끝나가고 있었고, 어둠의 문처럼 천장이 열리며 놓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종들은 몸을 똑바로 세웠고, 높이 떠 있는 하현달이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는 달을 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다른 쪽으로 옮겨가 다시 병실을 지키는 탁 트인 하늘을 보고자 눈을 떴다. 눈을 뜰 때마다 달이 뜬 밤이었다. 적들이 돌계단을 통해 그를 올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의 머리는 아래쪽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현실을 담는 이야기도 제법 있다. 루이사 발렌수엘라 <검열관>은 20세기 남미의 흔하디 흔한 독재정권하에 망가지는 나약한 인간성을 담는다. 해설에서는 ‘자신의 피조물에 의해 삼켜진 작가의 개념은 현저히 보르헤스적이다.’라고 표현했다. 보르헤스는 그들 중 거두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 중 하나이다. 모든 작가들을 그 대표에 아랫단에 놓지는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