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도서관에 이 책을 신청한 나 자신을 반성하는 바이다. 알파벳 즉 모든 문자들의 기원을 사회과학적으로, 문화인류학적으로 풀어쓴 책일 줄 알았다. 유발 하라리 풍의 책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 담긴 오래된 알파벳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단 너무 두껍고 지나치게 학술적이다. 논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당연한 걸 테지만 우리의 알파벳 ‘한글’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역자 주로 잠시 언급될 뿐). 내가 개인적으로 이 책을 샀어도 조금 실망했겠지만 이걸 학교 도서관에 신청하다니!
물론 학교 도서관에는 꼭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책만 들어오진 않는다. 교사 등 어른들도 학교 구성원이기 때문에 책을 신청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늘, 중학생인 우리 아이들도 한 번쯤 들춰볼 수 있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표지를 봐두었다가라도, 나중에라도 읽어보고 싶어질 책들로 신청하려 애써 왔건만... 이 책은 책깨나 읽는다는 어른들도 끝까지 읽기에 너무 버겁다....
솔직히 말하면 맨 앞과 맨 뒤를 중점적으로 읽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나오는 다양한 글자들은 베껴 ‘그렸다’. 한글워드프로세서에서 콘트롤 + F10을 누르면 나오는 많은 문자표를 보면서 언젠가 저것들을 한 번 베껴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너무나 많고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그 문자와 기호들! 이 책을 보고 만년필로 하나하나 그려본 알파벳들은 그때의 다짐을 되새기듯 신비했다. 의미와 소리를 알 수 없는 그 수많은 알파벳들을 그리면서, 판타지 소설 작가라면,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구상하는 감독이 되어 신비로운 글자를 만들어보는 상상을 한다. 잠들기 전 온갖 색이 든 대여섯 자루의 만년필을 번갈아 써가며 스케치북에 써본 이국의, 고대의 알파벳들이 준 기쁨으로 이 책의 내용을 다 못 읽은 아쉬움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