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 예술 수업
  • 오종우
  • 15,300원 (10%850)
  • 2015-01-21
  • : 3,180

 

몇 년 전에 우리 학교 선생님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의 주제로 ‘수업 개선’과 관련한 책을 읽고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선생님이 이 책을 선택했다. 흥미로웠지만 다른 책을 읽느라 제쳐두었던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한 젊은 동료 교사가 자율 휴직을 신청해서 올해 학교에 안 나온단다. 손에 꼽을 만큼 의미있는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정년퇴직까지의 시간 중 그와 함께 일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에 대해 아쉽다고 말했다. 그처럼 똑똑하고 성실한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 환멸을 느끼고 대학으로 갈 생각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서 불안하기도 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경제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어느 삶의 현장에서나 비슷한 일들이 있겠지만 특히 학교는 유능한 교사를 품기엔 그릇이 너무 작다. 물론 그에에 이런 걱정을 비칠 수는 없다. 그저, 당신같이 괜찮은 교사가 현장을 꼭 지켜주길 바란다는 속절없는 바람을 전할 수밖에. 속절 없는 이유는 내가 선배교사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설사 교장이나 교감이었더라도 딱히 할 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휴직을 떠나기 전에 뭐라도 줄 게 없을까 생각했다. 무슨 선물처럼 말고 그냥 무심하게. 그래서 보던 책 중 그의 수업과 연관이 있는 것들 몇 권을 고른다. 그가 신임교사였을 때 배움의 도><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프레이리 교육론> 등의 책을 주었던 기억은 난다. 이번에는 토론에 관한 책과 이 <예술 수업>을 주면 어떨까 싶다. 좋은 수업의 영감을 줄 수 있는 책일 것 같아 보여 후딱 읽어보고 주려 했다.

나의 감은 틀렸다. ‘후딱 읽어’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판이었다. 생각할 것도 메모할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읽고 싶은 책이었다. 정말 좋은 책이 홀대받고 있었구나, 싶었다.

 

이 책이 성균관대 교양 수업을 책으로 옮긴 것이란 걸 확인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 대학생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고 오종우 선생의 수업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이 책이 수업 현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면, 수업을 위해 그가 준비한 자료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하며 그 노고에 감탄했다. 게다가 그것을 글로(혹은 말로) 표현할 때 그 표현력과 그 안에 담긴 성찰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책도 참 좋지만 책 속 장면을 대학 강단에서 벌어지는 수업이라고 상상해 보니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을까 싶어 찬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참 행복했을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교수님에 언급한 책과 영화, 음악, 그리고 그림들을 검색하고 도서관에 가서 찾아 보고, 읽어 보고 들어 보려 애썼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뇌와 가슴의 변화는 얼마나 신선했을까.

 

다만 저자가 예로 드는 것 중 특히 문학작품들은 그야말로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것들인데 요즘 학생들은 톨스토이나 체홉, 도스토옙스키(그러고 보니 오종우 선생도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가 보다)를 즐겨 읽지 않는다. 그들의 문해력과 지력은 활자나 책을 읽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종우 선생이 예로 드는 텍스트들, 요즘 젊은 대학생들이 얼마나 고개를 끄덕일지 걱정이 된다. 수업을 듣고 나서라도 그 책을 찾아 읽고 싶어질까. 막상 손에 들면 재미있게 읽겠지만 안톤 체홉을 읽고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찾아 볼 대학생이 몇이나 되려나.

그렇다고 해서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대로 영상 콘덴츠만을 텍스트로 하여 수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학교에도 대여라고는 하지만 모든 중2, 중1 학생들에게 태블릿을 안겨주고 그것으로 미디어 수업을 해왔지만 실익보다는 부작용이 많아 보인다. 수업 중 억지로 종이책으로 된 읽기 자료를 읽도록 구성을 한다.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과 긴 시간 책 한 권을 읽어내는 것은 매우 다르다. 일부러라도, 학교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할 판인데 칼라 사진과 영상이 가득한 전자매체를 활용해 수업을 하란다. 이 학생들이 학교에서 그것을 운용하는 방식을 배우지 않아 미래사회에 도태될 일은 없다.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자기 머리와 자기 가슴으로 습득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일이다. 그래서 오종우 선생의 고전적인 텍스트들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학생들의 감각에 맞춰서도 안 되지만 이제는 사라져갈 자료들로 수업을 할 수도 없는 모순 앞에서. 그래, 세월이 가면 어떤 것은 버려지고 극소수의 것들만 살아남겠지. 늙어가는 이들은 모여서 어렸을 때 읽은 책 이야기나 음악 이야기를 할지 몰라도 젊은이들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겠지. 이 좋은 책을 덮으며 그런 씁쓸한 생각을 해본다. 물론, 휴직하는 그 40대 초반의 교사는 돌아와서 고전이로되 결코 낡지 않은, 선별된 좋은 자료들로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수업 토론하는 수업을 펼쳐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 있는 고민을 하는 선생들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제 마음 놓고 교단을 떠나도 될 것이다.

 

철저하게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안타까울 때도 없다... 용모는 뛰어나되 표정은 풍부하지 못하다. 그럴듯한 교육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써먹을 줄 모른다. 지성은 있되 본인의 사상은 없다. 가슴은 있되 관용이 없다... - 도스토옙스키 <백치> 중(책 속 인용)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