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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의 책놀이터
  • 변신
  • 프란츠 카프카
  • 7,200원 (10%400)
  • 2004-05-31
  • : 214

벌레 같은 삶

대학교를 졸업한 다음날 아침,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난 엉뚱뚱이는 자신이 무시무시한 벌레로 변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벌레로 변한 그를 처음에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가족들은 대했다. 때되면 밥 먹으라고 말도 해주고. 시간이 지나자 그가 무엇을 먹든 신경쓰지 않았다. 다른 이웃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꺼렸고, 그는 집 안에 없는 사람 같았다. 손님들이 왔을 때 그가 방에서 기어나오자 가족들은 그를 망신스러워했다.

그는 결국 멸시 속에 삶을 마감했다. 가족들은 그가 없는 아름다운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카프카의 '변신'을 현대에 맞게 재구성해 보면 위 이야기와 같을 것이다. 변신의 처음과 끝을 보자.

카프카의 '변신'

어느 날 아침,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무시무시한 벌레로 변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변신, 카프카, 좋은생각, 2004, 9쪽.)

자세히 살펴보니, 앞날의 전망이 썩 나쁜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는 서로 상세히 물어보지 않았지만, 세 사람 모두 상당히 훌륭한 직장에 취직했으며, 특히 앞으로의 전망이 좋았다. 또 이사를 하면 상황을 당장 쉽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레고르가 골랐던 지금의 집보다 작고 값싸지만 위치가 좋고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집을 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잠자 부부는 점점 활기를 띠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딸이 최근 얼굴빛이 창백해지도록 고생을 했지만 어느새 토실토실 예쁜 처녀로 피어났음을 거의 동시에 느꼈다. 잠자 부부는 점점 조용해지며 거의 무의식적으로 서로 눈길을 나누며 이제는 딸을 위해 훌륭한 신랑감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전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런 딸의 모습을 통해 잠자 부부는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들이 확인 받는 느낌이었다. (변신, 카프카, 좋은생각, 2004, 97~98쪽.)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한 뒤 가족들은 처음에는 놀랐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레고르는 방에서 뒹굴뒹굴 놀다가 아버지의 폭력으로 다치고, 그의 방마저 창고로 쓰이다가 끝에 가서는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그가 죽은 뒤 가족들은 슬퍼하기 보다는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들을 생각하며 기뻐한다. 냉혹한 가족들. 자신의 아들과 오빠가 죽고 난 뒤 도리어 기뻐하는 가족들. 끔찍하다.

당신도 변신하고 싶다면

벌레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백수가 되는 것이다. 백수가 되어 한 해, 두 해만 놀면 온갖 억압과 강요, 천대 속에서 그레고르처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변신의 방법치고는 너무 간단하다고? 믿지 못하겠으면 해봐라. 가족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버러지보다 못한 놈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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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설을 읽는 다른 두 눈

변신을 처음 읽었을 때 난 이런 생각을 갖지 못했다. 변신을 읽고 나서 해답지(?)를 엿보는 마음으로 책의 끄트머리에 있는 해설을 읽었다.

작품해설

우선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변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커다란 벌레로 변해버린 어느 ‘평범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부터 가족을 위해 밤낮없이 일만 했던 그가 왜 벌레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더 기가 막힌 것은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그가 결국은 가족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방에 갇힌 채 쓸쓸히 죽어갈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뒤에도 가족은 잠깐 슬픔에 잠길 뿐 곧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밝은 미래를 꿈꾼다는 이야기의 결말이다. 카프카의 세계에는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대략의 줄거리 진행만 보자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너무도 부당한 일을 겪은 것처럼 보이지만 좀더 자세히 읽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우선 잠자는 가족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희생이 정말 반드시 필요했던 것일까? 그 희생의 대가로 그가 권력을 누리지 않았던가? 그의 희생은 결과적으로 자신과 다른 가족들의 삶까지 망치지는 않았던가? 만약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잠자에게 부정적으로 내려진다면 잠자가 벌레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은 것은 끔찍하긴 하지만 ‘정의로운’ 결말일 수 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부터 찾아보자. 잠자가 죽은 뒤 남은 가족은 오랜만에 전차를 타고 교외로 소풍을 간다. 세 사람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앞날의 전망이 썩 나쁜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는 서로 상세히 물어보지 않았지만, 세 사람 모두 상당히 훌륭한 직장에 취직했으며, 특히 앞으로의 전망이 좋았다. 또 이사를 하면 상황을 당장 쉽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레고르가 골랐던 지금의 집보다 작고 값싸지만 위치가 좋고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집을 원했다. (...) 잠자 부부는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들이 확인 받는 느낌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해피엔딩이 아닌가? 잠자는 자신만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로, 남은 가족을 ‘무능력자’로 믿고 행동함으로써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잠자가 죽고 난 뒤 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은 잠자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말해 준다. 가족은 잠자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훌륭한 직장에 취직했고 또 무엇보다도 갑자기 닥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실용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간 잠자의 희생을 불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오히려 무능하게 만들었을 뿐이다.(변신, 카프카, 좋은생각, 2004, 272~274쪽.)

잠자는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가족을 무능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유능한 자의 권력을 맛보기는 하지만 오직 돈만을 위해 일하는 일벌레의 삶을 산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벌레로 변한 것도 우연만은 아니며 죽음을 통해 가족들의 삶에서 사라진 것은 - 물론 대단히 엄격하긴 하지만 - 부당한 판결로만 볼 수는 없다.(변신, 카프카, 좋은생각, 2004, 275쪽.)

문화정치론 선생님의 이야기

변신은 1912년 카프카가 쓴 작품(간행 1916년)이다. 시대적 배경이 된 산업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이 소외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열심히 일했다해도 일하지 않는 순간부터 벌레처럼 취급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상을 풍자한다는 뜻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오는 인간만이 존엄한 사회를 보여준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 것일까. 두 이야기 모두 설득력 있다. 선택은 자유. 난 뒤엣것을 택했다.

그가 돈만을 위해 일벌레로 살았다는 판결은 너무 가혹하다. 그레고르 자신은 계속 일해서 음악에 재능이 있는 여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다. 여동생은 아직 어린 나이였고, 잠자가 벌레로 변함으로써 여동생은 일을 해야만 했다. 피곤한 창백한 여동생의 얼굴은 고단한 그의 삶을 보여준다. 일벌레로 살았다해도 그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던 가족들이 그렇게 냉혹하게 그를 저버리는 것은 정당한가 의문이 남는다. 
 

2008/09/09 09:00 http://blog.hani.co.kr/noriteo/1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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