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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수 작품선
  • 이광수
  • 28,800원 (10%1,600)
  • 2003-04-15
  • : 40

 

  이광수의 단편 소설에 나타난 욕구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욕구를 표출하는 데 있어서 매우 솔직하다 못해 뻔뻔하기 짝이 없거나, 혹은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욕구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억제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전자의 시간적 배경은 이광수가 살던 시대이고 후자의 시간적 배경은 아주 먼 과거라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특히 후자는 신라 시대의 설화를 각색하여 만든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서 어찌 보면 이는 중국사에서 태평성대라고 회상되던 요순시대같은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얼핏 보기에도 이상적인 인간상을 다룬 후자의 이야기들은 시간적으로도 거리감이 있기에 현실감이 덜하다. 이광수가 본 현실은 전자에 가까웠기에 관련된 이야기는 전자가 훨씬 많다. 이광수의 모든 소설들을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 단편선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욕구란 어떻게 보면 상당히 개인적인 영역이면서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영역이다. 사회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동물이기 때문에 욕구가 들고 그것을 채우기를 갈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욕구를 대놓고 드러내는 것을 상당히 저급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과거의 조선시대 사회에서는 표면상으로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려하던 대상이 바로 욕구다. 체면과 선비다움을 중시하던 과거 조선시대에서 양반들은 제 아무리 배가 고파도 허겁지겁 먹지 않고 오히려 늘 입맛이 없다는 말을 인사치레처럼 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조차도 표면적으로 드러내기를 꺼렸던 것이다. 식욕뿐만 아니라 성욕이나 수면욕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으로서 향유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인 사랑이라는 요소도 대놓고 드러내기를 금기시되고 터부로 여겨졌다. 그랬던 욕구에 대한 인식을 이광수는 상당히 파격적인 방식으로 표면으로, 대중들에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단편선의 첫 번째 순서로 나온 <나>는 욕구에 대해 솔직하다 못해 뻔뻔하다. 유부남인 ‘나’가 과부인 문의 부인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상당히 거북하게 전개된다. ‘나’는 이기적인 필요에 의해 이미 결혼을 해 놓고는 아내는 타박하면서 오히려 가질 수 없는 대상인 과부를 넘본다.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려는 욕구와 동시에 사회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과부를 탐하는 육욕을 동시에 느끼는 ‘나’는 욕구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솔직하다. 이 제목이 ‘나’인 것은 작가인 이광수가 욕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서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대비적으로 마지막 작품이지만 시대적으로는 이광수의 초기작인 <사랑인가>에서는 욕구에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꿈을 실현할 가능성도 없이 불행해지는 주인공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교훈을 얻은 것일까. 욕구는 당연한 것이고 드러내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이광수의 주장은 이 뒤로 전개되는 작품들에 잘 나온다.

 

  특이하게도 두 번째 순서인 <꿈>에는 승려인 주인공이 욕구를 느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누구보다도 욕구를 절제하고 억제하여야 하는 승려가 욕구에 못 이겨 외간 처자와 야반도주를 하고 말년에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그러고 난 뒤 깨어보니 꿈이라는 이야기의 구조는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구조이지만 욕구의 측면에서는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승려도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인 이상 욕구를 느낀다는 점을 빌려서 이광수는 욕구가 누구에게나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임을 드러내려 한다. 다만 그것을 도덕이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효과적으로 절제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뒤로 가면 욕구에 있어서 더욱 솔직해져서 불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무명>인데, 감옥 안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식욕, 수면욕 등의 아주 기초적인 욕구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인물들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도 욕구를 도덕으로 절제하지 못한 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떡덩이 영감>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동네 사람들은 자신에게 귀찮은 일을 떡덩이 영감에게 모조리 맡기지만 그에 대해서는 매정하리만큼 무관심하다. 자신의 욕구를 채울 때에는 와서 찾아보지만 영감이 죽고 난 뒤에는 뒤처리를 귀찮아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작품선의 후반에 나오는 <가실>은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욕구에 대해 무절제적이고 뻔뻔한 당대 사회에 대해 제시된 일종의 이상적인 인간형이 가실이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안에서 효과적으로 절제한다. 그 결과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동안의 일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처럼, 자신의 욕구를 위해 떠나가게 된다. 이는 이광수가 보기에 일종의 이상적인 해결책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시간적으로도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이기에 당대와는 다른 조건이 많을 터이고, 세상은 가실의 이야기처럼 그리 호락호락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적어도 이광수가 살던 시대에는 그랬다. 이 이야기는 일종의 요순시대에 대한 환상처럼 과거에는 이랬던 적도 있었다는 점을 막연하게 꿈처럼 제시함으로써 일종의 이상향을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더 이상 선비의 체면치레를 중요하게 여길 수 없고 생존을 위해 욕구에 대해 솔직해져야만 하는 시대에 이광수가 태어났기에, 그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은 당연히 그렇다고 느꼈다. 욕구에 대해 쉬쉬하고 솔직해지지 못한 양반들은 몰락해갔다. 그랬기에 이광수는 살기 위해서는 욕구에 대해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런 주장을 직접적으로 펼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작품을 통해서 보건대 그는 욕구에 상당히 충실했다. 물론 과하게 충실해서 거북스러울 정도까지 간 작품도 있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 그러한데 이는 이광수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일종의 변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욕구에 충실한 것과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행위를 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다 보니 미처 그 규범이 내면화되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면 마저도 현실에 적응해나간 그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초기작인 <사랑인가>에서는 보다 순수한 형태로 사랑이 제시되었지만 이후의 작품인 <나>에서는 보다 세속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측면을 제외하면 욕구에 대한 솔직함은 사회적 규범에도 적절해 보인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사회적인 규범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욕구에 충실해질 필요가 있다. 이 주장이 바로 이광수가 단편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작품에서 과거는 긍정적인 면모가 지배적이고 현재는 그 반대로 묘사되어 나타난다. 규범과 욕구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던 과거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독 그의 작품에는 꿈과 관련된 제목이 많다. 어쩌면 이광수는 소설을 통해서 문화 지체 현상을 극복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의 소설에 나온 시간들은 욕구에 충실하다. 그렇지 못하면 존재할 수가 없다. 전반적으로 현재의 자신에 대한 약간의 자기변호와 시대에 대한 새로운 가치 판단이 보인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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