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이혜미의 이야기에 화답하듯 써내려간 나의 세계다. 아주 조금의 진실을 뒤섞은 거짓의 세계. 혹은 그 반대.
잠깐, 아주 잠깐, 어떠한 행위을 멈출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바라본 거울에서 무언가, 전에는 보지 못한 것을 발견했어. 얼굴 정 가운데를 아슬히 비켜나간, 세로로 나열된 것.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어. 별 생각없이 넘기던 쇼츠를 통해서 말이야. 자살점이래.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점과 기억을 함께 지워주는 곳을 알고 있니. 피부정신과 또는 정신피부과 같은 곳. 기왕이면 둘 다 없애는 편이 좋잖아.
아니다, 없앴다면 난 너의 글을 읽지 않았겠지. 읽을 필요도 없었을 거야.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들. 너의 세계가 낯설지 않다는 것이 슬프면서도 한 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어. 나의 세계 또한 너에게 마찬가지겠지.
내 어릴 적 세계는 검은 비닐봉지로 씌워있었어. 그 안과 밖에 내던져진 볼품없는 것들. 불 꺼진 것들. 주섬주섬 주워낸, 그것들을 게워낼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정말이지 노력했는데, 왜 아무리 노력해도 눈앞이 희뿌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까. 노력만으로 안되는 것들은 왜 이리도 많은지.
넌 적었지. 결점은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더 이상 결점이 아니라고, 난 조금 다르게 답할께. 자기 자신 외에 그 누구도, 청자이자 독자가 될 수 없는 그런 결점은 끝내 말해지지 못할 거야. 말할 수 있는 결점이라는 것은 어쩌면, 용인되어지는 결점일지도 몰라. 그래, 거기까지. 딱, 그만큼만.
내 결점은 이상하고도 지독한, 역겹고 메슥거리는, 매섭고도 매서운 것들 사이에 있어. 그것은 이미 나를 관통했고, 그 텅 빈 공간은 우물과도 같지. 빛이 들지 않는 메마른 우물. 너가 삶을 어떻게 지어올릴지 생각하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물을 길러야 했지.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늦게 찾아온 것들은, 더 이상 갖고 싶지가 않아. 다 때가 있는 거잖아. 때를 놓친 것들은 더 이상 소중하지 않아. 나는 그래서 일부러 이름을 잃어버렸지. 이제는 내가 찾아가고 싶은 것들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사랑하고 싶은 이들의 이름을 품에 안고 싶어서.
너가 버지니아를 떠올린 시간만큼, 나는 에르노를 떠올려. 방금 날을 간 것만 같은, 칼날인지 펜촉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뚝뚝 떨어지는 선홍빛 핏물 같은 이야기. 자기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 발화, 폭발하는 불씨. 내게 에르노는 피 흘리는 마리아야.
그녀의 글은 때론 내게 구원이 되고, 그 자체로 빛이 되지. 나는 그 빛에 의지해 덜덜 떨리는 손과 발로, 매서운 바람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걷고 또 걸어. 긷고 또 길어. 메마른 우물을 채우기 위해서. 실은, 채워지는 것은 중요치 않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그 발걸음, 그 발걸음에 집중할 뿐이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우물에 빠져 죽지 않는 것. 귀신이 되지 않는 것.
멀리, 아주 멀리 흐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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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즈덤하우스로부터 책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