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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용운 연구는 민족주의에 인식이 제한되어 한용운의 ‘진보의 사상’이 갖는 구체성을 다각도로 논의하지 못했다. 한편 근래에 활발하게 전개된 민족주의 비판 흐름은 한용운의 불교 사상의 외부 영향 특히 일본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를 철학적이며 동시에 종교적 성질을 가진, 따라서 ‘철학적 종교’로 규정하는 것은 엔료의 영향을 반영”한다는 지적을 비롯해서 “한용운의 문명 인식은 메이지 일본의 근대지가 (...) 착종된 형태”라는 비판과 “신화적인 이미지”, “과대평가”를 재점검하자는 주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장에서는 한용운의 ‘진보 사상’이 민족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보편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일본 메이지 사상의 일방적 수용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겠다.

조명제는 “한용운은 유신론에서 미개(야만)-문명이라는 시각에 입각한 서구 근대의 문명론을 수용하였으며, 거의 전편에 걸쳐 문명론의 시각이 드러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한용운이 일본 메이지기 사상으로부터 연원한 ‘사상의 연쇄’에 의해 ‘착종’된 사고에 빠졌다는 주장의 한 예시이다.

조명제는 “서양 말에 공법 천 마디가 대포 일문만 못하다는 말”이 량치차오가 1899년에 발표한 자유서의 문야삼계지별에서 온 것이라는 점, 그것은 또한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지개략 2장 서두에서 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문명-미개(야만)이라는 문명론의 도식과 언설은 후쿠자와 유키치-량치차오-한용운으로 이어진 사상연쇄의 전형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용운은 이러한 문명론을 오히려 “야만”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한용운의 진술 맥락은 아래와 같다.

 

“서양 말에 공법 천 마디가 대포 일문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이런 것은, 굳이 말한다면 야만적 문명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니, 적어도 도덕과 종교에 입각해 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찬양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보듯 한용운은 서양의 문명론을 “야만적 문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한용운의 인식이 야만적인 서구의 문명론을 제대로 거부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거나, 그 때문에 곧잘 전통으로의 회귀에 빠진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이선이는 “한용운이 ‘야만적 문명’을 목도하면서도 문명이 더욱 진보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불교=근대’라는 등식을 전제”로 삼은 한용운이 “근대를 비판할 자리를 스스로 제거”한 데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또 다른 지면에서는 “량치차오가 도덕주의를 구현할 방안으로 강고한 국가주의를 설정했다면 한용운은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도덕과 종교를 최종 심급으로 상정했다.”고도 진술하는데 이런 주장을 종합하면 ‘근대=불교=도덕’이 모두 현재의 지평면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인용했듯이 한용운은 오히려 ‘근대=야만적 문명’이라는 등식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을 ‘미래의 도덕 문명’으로 전환시키는 실천에 불교가 참여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아래의 인용을 보자.

 

“다만 문명의 정도가 날로 향상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그때에야 그릇된 철학적 견해나 그릇된 신앙 같은 것이야 어찌 다시 눈에 띌 줄이 있겠는가?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착실하게 할 것이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현재=서구적 근대=야만’에서 ‘미래=도덕 문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한용운의 입론이며 이를 위한 실천으로 불교(참선)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앞에서 일견한바 ‘불교=근대’이기 때문에 근대를 비판할 수 없었다는 입론과는 차이가 크다. 한용운은 「내가 믿는 불교」에서 “그러면 불교의 사업은 무엇인가. 가론 박애요 호제입니다. 유정무정, 만유를 모두 동등으로 박애·호제하자는 것입니다. 유독 사람에게 한할 것이 아니라 일체의 물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제국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이 실세력을 갖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 이러한 박애, 이러한 호제를 말하는 것은 너무 우원한 말이라 할지 모르나 이 진리는 진리이외다. 진리인 이상 이것은 반드시 사실로 현현될 것이외다.”

‘사상 연쇄’론은 일본, 중국, 한국의 사상을 단선적으로 그리고 시간순으로 실체화하지만 이와 달리 한용운은 “식민주의의 현실적인 동시대인”으로서 다양한 가능성들을 복합적이고 능동적으로 취사선택하여 주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 중요한 사례로서 일본으로부터 연원하지 않는 ‘사상 연쇄’의 역동성의 예로 벤자민 키드(Benjamin kidd, 1858~1916)의 사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벤자민 키드는 당대 일본에서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콩트가 최초로 윤곽을 잡고 다윈이 정련한 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당대 최고의 논리적 형식을 획득한” 벤자민 키드의 사상을 량치차오는 1901~1903년경에 서구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적 점검이라는 큰 기획 아래 주목한 것으로 보이며 「진화론혁명자 키드의 학설」을 1902년 10월 16일 『신민』 제18호에 발표하고 음빙실문집에도 수록하였다. 한용운이 음빙실문집을 탐독한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벤자민 키드는 “인간의 진보를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힘이 초이성적인 것, 즉 종교에 있다는 논의를 펼침으로써 사회진화론을 계몽주의의 자장 바깥으로 끌어냈”다고 한다. 키드는 스펜서류의 진화론에 대항하여 인간사회의 진보는 초이성적인 요소 특히 종교적 힘에 의해 추동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반이성주의적 진화론은 1890년대 다위니즘과 종교와의 화해라는 세기말적 현상에 부응한 것으로 이후 베르그송, 윌리엄 제임스 등 직관주의 철학의 전조였다. 키드는 다윈의 경쟁과 선택의 원리를 적용하되 그 중심부에 종교적 요소를 배치했다.

한용운의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할 것이라는 ‘도덕주의’는 세기말 “제국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이 실세력을 갖고 있는” 시대에 ‘너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라’는 칸트적 계몽주의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키드와 공유하였다. 키드의 ‘종교진화론’은 “현재적 이기심”이 근대 문명의 진보를 제한하고 있으므로 “종교”를 발전시킨 문명이 근대 이후의 문명 진보에 더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한용운의 사상은 ‘일본-중국-한국’으로 이어지는 ‘사상 연쇄’의 ‘착종’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교정될 필요가 있으며, 한용운의 불교개혁 운동은 불교에 한정된 개혁운동이 아니라 불교를 통한 문명진보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정된 ‘도덕주의’는 단순히 전통 회귀로 볼 수 없다. 다음 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한용운의 시와 ‘선외선’ 사상이 ‘희박한 언표’로서 상호작용하는 양태를 짚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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