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
홍정 2003/09/06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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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야스쿠니 신사에 많은 참배객들이 몰렸다고 한다. 이차대전 때 전사한 이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그곳에 그들의 패전 기념일,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광복절 주간인 8월에 참배객들이 모이는 것은 굉장히 씁쓸하다. 거기다 간간히 신문이나 뉴스에서 들려 오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명시적 폭력이나 우경화는 혹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지내는 예의 바르고 선한 몇몇 일본인들과 현대를 디스토피아로 보고 앞으로 다가올 아이들의 세상에 부디 평화가 있기를 바라는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이들을 볼 때, 일본이라는 나라는 내게 모순으로 가득 찬 기묘한 곳으로 보인다. 이 책,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에서 저자는 일본의 창세신화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옴 진리교 사건까지, 일본의 종교사를 훑어 나가며 그 기묘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밝히려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밝혀낸, 그리고 내가 느끼는 기묘함의 원천은 그들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선악의 역설과 어령(御靈) 신앙, 그리고 원령(怨靈)에 대한 관념이다. 산천초목에서 한낱 미물에 이르기까지 신이 깃들어 있고, 그 신에는 나쁜 신도 좋은 신도 있으며, 나쁜 신이 좋은 신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로 변하기도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에 따라 깃들어 있는 신이 우리 인간에게 해악을 미칠 수도 있으리란 두려움이 그것이다.
여기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선한 일본인’에 대한 의문이 약간 풀릴 수 있을 것도 같다. 어쨌든 편히 죽지 못한 원혼들을 달래 주어야 한다는 거다.(비록 선신과 악신을 구분하는 문화에서 자란 나로서는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또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는 분명 정치적인 의도도 개입되어 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부정한 것은 씻어내어 되돌릴 수 있고, 반대로 더러움이 타면 부정한 것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악신에서 선신으로, 선신으로 악신으로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선악관에서 저자는 일본인의 문화적 관용과 그 반대편에 폭력으로 화해 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본다. 초탈함을 이상으로 했던 옴 진리교가 선악의 역설이란 논리를 통해 곧바로 폭력을 정당화하게 되고, 결국 폭력이 되어 버린 것이 그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이 자신을 합리화했던 대동아주의의 그림자를 보았다. 자신들이 품고 있는 이상,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옳은 것이라는 확신하에 어느 정도의 폭력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도 있다는 논리적 정당화. 여기서 너그러움과 폭력은 위태한 경계에 서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그 경계를 넘어서 버리게 하는 것은, 중립을 가장해 쏟아지는 정보들과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버리는 성찰하지 않는 개개인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만 개개인으로서는 선한 일본인들이 어째서 야스쿠니 신사 같은 데를 가는 걸까라는 의문에만 한정되는 것일까.
이 책을 읽어 가면서, 나는 한 사회의 정신문화에서 기저를 이루는 종교를 통해 일본이라는 나라를 살펴보자는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 자꾸만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자의적인 종교적 혹은 도덕적 판단을 통한 오독(誤讀)이 일본에만 한정되는 기묘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얼마 전에 있었던, 부시의 자의적인 선악구분을 보라. ‘그래도 살아라’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언과, ‘모두 죽어 버리면 좋을텐데’라는 안도 히데야키의 전언이 거의 동시에 유행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 역시 이 희망과 절망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다. 다만 여기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밝은 눈으로 살피고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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