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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el, noel
  • [전자책] [세트] [BL] 레인보우 시티 (총6권/완...
  • 채팔이
  • 19,000원 (950)
  • 2020-06-08
  • : 618

종말의 세계, 혹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레인보우 시티>는 배경부터 스산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인간의 탐욕은 결국 세계를 초토화시켰다. 작중 배경이 되는 세계는 '아담' 제약회사의 욕심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졌고, 인류는 제어불능의 바이러스와 싸우는 중이다. 이런 세계는 언제나 인간의 인간성을 시험하고 나약함과 추악함을 드러내게 하며 극한의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인간으로서 지켜나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중세의 페스트처럼 퍼져나간 바이러스는 마침내 세계를 파괴했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끊임없이 아담(=좀비)의 공격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남겨진 자들의 사회란 생존이 지상 최대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생존을 위해 무엇을 제한하였으며 어떤 가치를 버렸는가 생각케 한다. 문명과 기술의 발달이 낳은 비극을 목도하지만 그럼에도 인류는 살아가고 살아남는다.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가면서 말이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이 길에 두 사람이 있다. 여기, 눈부시게 빛나는 곽수환과 석화의 이야기가 있다.


채팔이 작가가 쌓아 올린 '레인보우 시티'의 이야기는 곽수환과 석화의 우연같은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눈길을 잡아끄는 만남이다. 채팔이 작가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제주'라는 공간은 특별함이 담겨 있다. 이번 작품의 '제주'는 곽수환과 석화가 처음 만난 장소이면서 사실 어떠한 비극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현재 타임라인의 '제주'가 가지는 의미는 가진 자들의 낙원과도 같은 곳처럼 느껴진다.


평범한 일상이 존재하던 곳, 그러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린 곳. 그곳에서 곽수환은 한겨울에 슬리퍼 하나 달랑 신고 모래사장 해변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는, 어디 높으신 분의 자제인가 싶은 녀석을 만난다. 그가 바로 석화였다. 곽수환은 그를 보며 한겨울인데도 맨발에 얇은 차림인 그가 어디 모자란 게 아닌가 생각을 했으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양말을 벗어주고 온다. 막상 석화는 거기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첫 만남이야 이렇게 떨떠름하고 썩 유쾌하지는 않은 모양새였다.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땅 제주. 육지에서는 아담으로 인해 여전히 불안한 일상과 버려진 삶들이 넘치지만 이 섬 '제주도'는 좀전의 '모지리'조차 한가로이 해변에서 돌을 주울 수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뭐, 그게 무슨 상관인가. 곽수환은 여기에 온 목적을 완수하면 될 터인데.


상관인 장 중령에게도 저러다 등짝 한 대 맞겠다 싶을 정도로 가벼운 언사인 곽수환이지만 이런 모습은 제주에 도착한 곽수환의 시니컬한 생각과 상충되는 듯하다. 곽수환이라는 사람의 속은 쉽게 알 수 없겠구나 하는 인상을 준다. 쉽게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남자. 그 남자가 제주에 온 목적은, 아니 타의에 의해 제주에 와야 했던 이유는 '돌 박사'를 서울로 데리러 가기 위해서였다. '돌 박사' 석화는 여의도 쉘터의 수석 연구원 오양석 박사의 빈자리를 대신할 재원이었으나 체력은 바닥인 돌연변이이다. '돌'에 집착하는 돌연변이.


이 세계의 돌연변이의 존재란 체력이나 두뇌 중 어느 하나가 뛰어나면 어느 한 쪽은 평범 이하의 수준을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곽수환은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다지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단순하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그의 존재 자체는 온통 물음표와 의문으로 가득차 있다. 


꾸밈 없고 언뜻 저렴해 보이는 언사는 몸을 숨기고 사냥감을 기다리는 맹수의 몸짓과도 같았다. 표면적으로야 술을 구하러 레드 구역에 쳐들어갔으니 영창행이 예약이었지만, 실상 그것은 비밀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한달 영창행 대신 '돌 박사'를 경호하는 일로 제주에 오게 된 곽수환이었고, 이로 인해 석화의 경호를 맡으면서 자꾸 그와 얽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곽수환이 던진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그가 속에 감추고 있는 불꽃을 본다. 그는 군인이지만 국가에 충성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현재의 레인보우 시티가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 군인에게는 인권도 법도 없는 현실이 곽수환이 가진 화두라는 것이다. 곽수환의 과거는 상당히 어두운 것이었다. 능글맞으며 장난 가득한 듯한 곽수환이지만 그의 어린시절은 아담이 되어버린 가족을 스스로 처리한 후 홀로 선 지독한 일 투성이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며 남긴 '살아'라는 메시지는 홀로 남은 열 넷의 소년에게는, 겨우 두 글자 적힌 메시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되어 컸던 소년에게는 회한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살아왔다. 총알받이 신세인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으로, 100명이 넘던 동료가 단 4명 남은 현 상황까지 그가 아담이 창궐하는 세상에서 얼마나 험하게 살아왔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는 최전선에서 아담을 상대하는 자였고, 이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싸우고자 가슴의 불꽃을 숨기는 자였다.


스스로가 가진 힘으로 살아남았던 그에게 누군가를 지킨다는 생경한 임무는 짐짓 불쾌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군인이 무슨 경호냐며 다른 놈 시키라던 그였다. 하지만 결국 경호 임무는 단 한달간만이라는 한정을 두고서 받아들인다. 자신과는 다른 체력0의 석 박사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존재이다. 식사 중에 픽픽 쓰러지기도 할 정도였으니 경호하기에 얼마나 손이 많이 가겠는가. 게다가 그가 의식은 하지 못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다른 감각을 느끼게 하는 자였다. 


곽수환에게 누군가를 지키는 일은 생경한 것이었다. 하지만 석 박사로 인해 타인을 지키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추운 날 가벼운 차림으로 돌이나 줍고 다니는 '모지리'인 줄 알아서 양말을 벗어주는 오지랖을 부렸고, 석화를 보며 몸이 두 번이나 자연적으로 반응했었고, 몸 약한 석화를 기절시킨 것에 대해 어색한 사과의 마음도 있었다.


곽수환은 석화는 굴이라고 설명하는 그의 말을 십분 수용하여 이제는 ‘돌 박사’가 아닌 ‘굴 박사’로 부른다. 이 모든 것은 저 위의, 무표정한 석화에게서 극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끊임없는 도발이기도 했다. 물론 석화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나는 늘 언어가 가진 인식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석화를 부르는 곽수환의 호칭이 점차 변화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돌 박사'는 석화에 대해 타인이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호칭이다. 하지만 '굴 박사'라는 것은 '석화'라는 이름의 내력을 공유하는 상태로서의 곽수환이 다가간 단계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 말은 힘이 있고 항상 언어로 규정되고 정의되는 것들은 대상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곽수환에게 석화의 사적 영역이 공유되었다는 것, 그로인해 곽수환이 석화를 알아가는 범주가 넓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굴 박사'에서 '자기야'로 몇 단계를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인상적이다. 


'자기야, 자기야, 일어나. 레드 구역으로 데이트 오자며'


이 둘이 얽혀들어가는 지점은 상당히 재미있다. 석화는 영문을 모른 채 오양석 박사의 죽음 때문에 갑작스럽게 여의도로 불려 올라왔고, 곽수환은 헌병대 컨트롤러라는 비밀스러운 신분을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사건의 진상에 가까운 자였다. 석화는 뛰어난 두뇌(와 아름다운 외모) 외에는 다른 부분에서 객관적인 장점을 찾기 어려운 종류의 인간이다. 그에 비하면 곽수환은 대부분의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곽수환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가 석화라는 것이 느껴진다. 특별한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석화에게도 곽수환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둘에게 부재한 것은 가족이었고, 사소한 감정을 전해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열 넷에 홀로 남겨진 곽수환에게는 돌아갈 집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뜻하게 맞이해 줄 가족도 없었다. 가족은 아담이라는 미지의 존재가 되어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니 더 이상 공존할 수도 없었다. 감정이 결여된 것이 아니냐는 평을 들었던 석화에게 유일하게 감정을 알게 했던 존재인 석화의 어머니 역시 스물 후반에 갑작스레 세상을 등졌으니 이 둘 모두 급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에게 부재했던 사소한 따스함과 새삼스러운 애정은 변이 아담과 에덴동산이라는 사이비 종교와 얽혀들어가는 위험 속에서 피어난다.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았던 석화의 괴벽을 곽수환만이 그 자체의 특성으로서 받아들여 주었고, 그가 좋아할 만한 돌을 신기하게도 찾아다 주었다. 그리고 첫 만남 때부터 뭔가 경험하지 못한 감각을 일깨우는 석화였지만 아담에 물려 양성 반응이 나왔던 그때를 기점으로 곽수환에게 확실하게 특별한 사람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강한 곽수환이었지만 그가 가진 유일한 패배는 아담으로부터 가족을 지키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석화는 그 상황에서 약하디 약한 신체로 아담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지켜낸 것이다. 그것은 곽수환에게 거의 구원과도 같은 일이었다.


아담 바이러스로부터 해결책이 없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물리친 석화는 곽수환이 잃을 뻔했다가 다시 찾은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질병의 치료제가 없다는 사실은 희망이 없다는 것과도 같다. 그랬기에 석화는 그 자체가 희망이며, 곽수환의 유일하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곽수환과 석화의 부모 세대의 인연, 혹은 악연은 곽수환과 석화의 필연이었고, 석화가 곽수환보다 연상이라는 사실 자체가 거대한 고통이면서 희생이었다. 하지만 석화는 연약한 신체와는 반대로 단단한 심지를 가졌으며,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전한다. 석화는 그야말로 강인한 사람인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지 않으며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빛나는 사람. 


둘은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이 빌어먹을 세계의 종언을 고한다. 


무수한 유전자 편집을 통해 아담 바이러스에 대항할 존재를 만들었던 시티의 연구원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에덴동산이 만들어지고 그 안의 주축 멤버들 간에도 이견이 생긴 것이지. 인간의 추악한 욕망은 그럴싸한 대의명분으로 감추고 오랜 시간 인류를 농락했다. 권력과 지배욕에 사로잡힌 시티의 상층부가 초개처럼 버린 인생과 오만함이 희생시킨 생명들이 거기에 있었다.


완전한 신인류. 석화로 인해 탄생할 수 있었던 아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곽수환.


이들의 사랑은 그러하기에 안타까움과 눈부심으로 충만하다. 서로를 위해 살고자 했고, 홀로 견디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돌아 올 것임을, 그에게 돌아갈 것임을...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집착이 아닌 심장이 빚어낸 상대를 향한 강렬한 마음은 바로 사랑이었다. 어떤 시국에도 사랑이 꽃 피었다는 가슴 벅찬 명문장은 그들에게 차고 넘친다. 어떠한 것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서 빛나는 사랑을, 그들은 살아남음으로써, 함께 살아남음으로써 증명해 내었다. 이토록 생을 갈망하게 하는 단 하나의 이유를 우리는 곽수환과 석화의 사랑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사랑, 이토록 빛나고 찬란한 것.

영원토록 빛날 것.


그러하기에 장밋빛 인생을 염원하며 다시금 벅차오르는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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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배경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매혹적인 곽수환과 석화의 이야기는 소설의 본편을 통해 꼭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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