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ION>
정태의의, 정태의를 위한, 정태의에 의한, 그리고 인간 정태의의 수난곡.
마치 통곡과도 같았던 수난은 다가올 부활과 영원함을 예비한 찰나의 고통이었던 것과 같이 정태의의 운명은 어떤 절연의 순간에서부터 시작한다.
세기의 천재 정재의를 쌍둥이 형으로 둔 지극히 평범한 듯 비범한 정태의는 정재의의 복록 그 자체로서, 길상천이다. 아마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어진 재의와 태의의 빨간 실은 태의의 운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빨간 실을 재의의 자의로 끊었던 순간 둘을 묶고 있던 운명은 방향을 달리 하여 구르기 시작했다.
혹은, 정태의라는 연은 빨간 실이 끊어지고서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바람을 만난다.
잠시간 UNHRDO라는 나무에 걸렸던 정태의는 생각지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바람을 만난다.
일레이 리그로우. 그가 누구던가. UNHRDO 유럽지부의 미치광이 릭. 리그로우 가의 둘째 아들, T&R 기동대의 수장. 너무나 멀쩡한 가문에서 튀어나온 규격 외의 인간병기.
정태의가 그와 얽히게 된 것은 삼촌이자 생물학적 아버지인 정창인의 UNHRDO 단기 복무 제안 때문이었다. 정태의의 수난은 정창인이 가족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정재의가 무기 개발자였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정태의는 정체 수상한 기구와 수상한 삼촌과 미지의 형 정재의를 두고 UNHRDO에서 부탁받았던 역할을 수행한다. 무사히 합동 훈련이 끝나길 기대했지만 재의가 잘라버린 빨간 실이 일레이 리그로우를 만날 운명을 이어버리고 원치 않았던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정태의를 빠트리고 만다.
<패션>을 읽다 보면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정창인의 방에서 연결된 화상 통화의 하얀 손이 아니라, ‘태의’라며 끈기있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했던 어린 정태의의 목소리에 이미 일레이는 이 존재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미치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통제불능에 상식 선에서 많이 벗어난 일레이인데도, 유난히 정태의에게는 특별한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패션>의 현 시점에서, ‘일레이’라며 자신의 퍼스트 네임을 가르쳐 준 것부터 시작일 테다. <패션> 본편 6권 내내 정태의와 일레이는 천천히 스며드는가 싶다가도 첫만남의 강렬함은 둘 모두에게 의미있는 시간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둘이 겪는 일들을 좇다 보면 이 길고도 긴 장편이 너무나 짧게 느껴진다.
특히 정태의라는 인물이 가진 특유의 여유로움과 평화로움, 체득된 체념이나 내려놓음이 극도로 긴장되고 비상식이 난무하는 배경에서 이상하리만치 안정감을 준다. 그러고 나면 왜 정태의라는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 납득하게 된다. 태의는 비상식적 세계의 상식선이자 안정제라는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류의 약간은 무심한 듯한 태도. 그러면서 적당히 참견하기도 하고 적당히 포기하기도 하고, 그 어느 선의 지극히 ‘적당한’ 사람이라는 점은 그를 이다지도 특별하게 만든다. 태의의 도망이 만들어낸 관계의 전복은 짜릿할 정도였다. 그 ‘일레이’를 그렇게까지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 ‘일레이’에게 그런 일을 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지극히 적당하고 지극히 평범해서 특별한 정태의는 일레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무슨 일을 겪더라도 끊어지지 않을 혈연인 정창인과는 달리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어떤 관계, 어떤 연결고리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유우지 님 소설의 수들이 가지는 특별함은 상대방이 어떠하든지 해탈한 듯한 고요함,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점에 스며들고 눈이 돌아가는 공들을 보면서 독자로서 지독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토록 지독하게 스며드는 사랑이라니. 일레이 역시 정태의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낀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며 적당히 투덜대다 적당히 포기하는 정태의에게 특별한 마음을 가진 일레이가, 자신은 정태의에게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이 얼마나 짜릿한가.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씹듯이 내뱉은 정태의의 말에 일레이는 그야말로 맹렬한 분노를 느낀다. 모든 것에서 특별했던 정태의의 도망은 일레이의 감정을 정확하게 일깨운 동시에 정태의를 잃고 싶지 않다는 일레이의 욕망을 정확하게 되살려 낸다.
<패션> 본편에서 백미인 사건은 정재의가 끊어낸 빨간 실도, 불운처럼 다가온 정창인과 UNHRDO에서의 복무도, 일레이 리그로우의 등장과 만남도 아닌 바로 정태의의 도망 사건이다. 그리고 세링게 섬에서의 일은 정태의에게도 일레이가 특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징은 믿음이라는 말은 반향이 컸다.
-너는 내 거다.
-잘 기억해, 태이. 오늘부터...이제부터 매일, 너는 내 거다.
-<패션> 6권 중 발췌
이렇게 말하던 일레이를 떠올리면서, 정태의는 자신의 무의식 아래에 깔려 있던 일레이에 대한 마음을 점차 자각한다. 뭔가 남아있던 중요한 그 무언가도, 확인해야 할 것도 다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의 감정을 자각한다.
“야, 나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닐까.”
이 말은 일레이의 귓가를 울리는 신호가 되었을 것이다. 일레이가 세링게 섬에 정태의가 감금(?)되어 있던 라만의 별저를 날려버린 일, 그 일은 정태의와 일레이의 조우를 알리는 요란한 축포였다.
국제수배자가 되면 어떠한가. 정태의는 보통의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들을 겪고도 맥주 한 캔이면 그냥 잊고 털어버릴 터인데.
남들이 미치광이라 힐난하며 두려워하며 떨 때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비인간성마저도 정태의 안에 일어난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는데 말이다. 일레이가 싫어지지 않는 이 상황도, 이제는 일레이 리그로우의 범주 외에는 벗어날 수 없는 이 상황도 ‘나쁘지 않다’며 또 그렇듯 받아들일 것이다.
정태의가 겪은 여러 기상천외한 일들은 어쩌면 일레이를 만나기 위함이었을까. 그리고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으로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였을까. 일레이 리그로우를 만난 정태의는 이전과는 달리 이리저리 흘러가며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휘몰아치는 바람 속을 날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저 창공을 나는 연이 자신을 얽매는 듯하지만 자유롭게 날게 하는 바람을 사랑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