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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허먼 멜빌, 조셉 콘라드, 마루야마 겐지 그리고 폴 오스터.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배를 탄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의 은유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들의 공통된 강박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들과 비슷한 질감의 강박을 가졌다고 느껴지는 작가들, 카프카, 베케트, 함순, 파울 첼란, 로라 라이딩 등의 작가들을 통해 폴 오스터는 그러한 강박을 성공적으로 언어로 표현해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일단 그의 약력을 알 필요가 있다. 그가 거친 직업들은 선원에서부터 통계조사원, 강사, 전화교환원 등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하다. 최종학력이 문학 석사임을 생각하면 그 직업 목록은 의아하게 느껴진다.

학력 따지기로는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이지만 다른 나라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생각할 때 그런 의구심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런 식으로 사서 고생을 했는가는 그의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미국 작가, 더 정확히 말하면 뉴욕의 작가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는 국경과 상관 없이 '걸신들린 단식'에 뿌리를 둔 일군의 작가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앞의 용어에서 우리는 가장 먼저 카프카의 단식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에는 카프카에 관한 글이 두 개나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 위치해 있는 글은 아예 '굶기sult'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크누트 함순의 소설에 관한 것이다. 그 글을 시작으로 그가 경의를 표하며 탐구하는 작가들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최후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폴 오스터의 내면이고, 나아가 우리들의 내면이다.(최승자 시인은 역자 후기에서 이것을 'The perceiver and the perceived are one'이라 표현하고 있다.)

직접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가에 대한 고전적 이야기들'은 그가 말하려는 바가 아니다. 행간에 숨어 있는 진정한 의미는 바로 '단식의 본질 그 자체가 이해를 거부하는 것'임을 밝히는 것, '처음부터 그 자신이 불가능한 일임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자신에게 어떤 실패를 선고하는 것, 그것은 좌절이나 파괴에 도달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 아닌, 징후 없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한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그의 모든 말은 '너무 멀리 간 예술가들'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로 집약된다.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이것은 더욱 확실해진다. 그는 견자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엄청난 노력을 들여 의식적으로 감각의 착란을 꾀했던 랭보의 정신적 후예이며, 이 책에 소개된 모든 작가들은 실상 폴 오스터 자신의 내면이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무(無)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무릅쓰려 하는 데에는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노력이 요구된다. 처음에 말한 '사서 고생'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진공 상태에서 머리로만 글을 쓰는 안일한 작가가 아니며, 직접 겪지 않고서 자기 것인 양 이야기할 수 있는 뻔뻔한 작가는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폴 오스터의 모든 글을 좋아하지만 특히 이 산문집은 영혼이 닮아 있는 타인들을 통해 드러난 그 자신의 의식인 까닭에 소설과는 다른 방향의 샛길을 통해 우리를 폴 오스터의 내면으로 안내한다. 삶이라는 것이 무언가를 더덕더덕 붙여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하나 벗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수긍하시는 분들 모두를 여기, 걸판진 굶주림의 잔치에 초대한다. 와서 마음껏 즐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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