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읽기에 가장 좋은 계절을 고르라면 아마도 여름일 것이다. 해당 소설을 영화로 만난 독자라면 두 사람이 함께 수영하던 장면이나 거의 모든 장면에서 상의 탈의를 보여준 엘리오 역의 티모시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다. 그만큼 여름 별장에서 누릴 수 있는 지적인 향연을 담아낸 소설을 휴양지나 적당히 시원한 방 침대 위에서 읽고 있는 것 자체가 휴가였다. 헌데 이 책을 연말 이벤트 선물로 받았고, 실제 다시금 푹 빠져 읽었던 지금의 계절은 겨울이다. 그런데도 좋았다. 엘리오에게 올리버와의 만남이 마음 속 혹한의 겨울을 여름으로 바꾸었듯 말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어요.(…)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눈보라 속에서 찬란한 여름을 되찾아오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23쪽
다시 읽어도 이 두 사람의 초반 밀당은 정말 같이 설레고 좋았다. 책으로는 오랜만에 다시 읽는거라 이토록 빠르게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빠져들었는지도 새삼 놀랐고, 어쩌면 그렇게 빠르게 상대에게 전부를 주고 싶다고 고백할 수 있는 모습을 보며 엘리오의 아버지의 반응도 조금 납득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좀 아쉽게 등장하는 두 사람의 문화예술 경쟁도 책에서는 정말 원없이 마주할 수 있는데다 시선을 엘리오가 아닌 주변인에게 두면 또 그 나름의 재미도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 집에 머문 지 벌써 3주째인데도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와 주세페 벨리, 파울 첼란을 아는지 물었다.
“들어 봤어요.”
“난 너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 사람 모두 전혀 알지 못했어. 이해가 안 되는군.”
“뭐가 이해 안 돼요? 아버지는 대학 교수이고 어릴 때부터 집에 TV가 없었어요. 이제 이해돼요?”
“그냥 다시 기타나 뚱땅거려!” 42쪽
마지막 문장이 아주 와닿는다. 우리집에도 TV는 없지만 우리 집에 사는 아이는 물론 또 다른 성인도 저 세사람을 모두 모르니까. 그런가하면 엘리오가 기타를 뚱땅거리면 올리버가 정말 잘 때도 있었겠지만 자는 척 듣고 있다가 관심을 보이면 집 안으로 들어가 바로 피아노로 들려주는 엘리오의 음악성은 봐도 봐도 멋지기만 하다. 올리버 또한 그 곳에 머물게 된 계기가 부모님의 원고를 손보기 위한 젊은 학자 중 하나다 보니 두 사람의 대화 자체가 남다르다. 하지만 이런 유희보다 엘리오가 올리버의 마음을 알지 못해 애태우고 괴로워하는 장면과 함께 소년이었던 엘리오가 나중을 떠올리며 현재 자신이 느끼는 초라함과 비참함을 견뎌내는 모습도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조금의 후회도 없다. 위험천만한 모험, 수치심,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무지, 그 무엇도 후회되지 않는다. (…)
내가 나중에 이 시간을 그리워할 수도 있고 훨씬 더 잘 살 수도 있지만, 그 시절 내 방에서 보낸 오후마다 내가 순간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항상 기억할 것이다. 207쪽
여름이면 SNS에 등장하는 짧은 작문 중 ‘…..여름이었다.’로 끝나는 문장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이 주제를 가장 잘 살린 소설이 <콜 미 유어 바이 네임>이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연애소설로, 혹은 금기로 다가오겠지만 성인이 되기 전 우리가 상상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금기에 해당하지 않는가. 그런 맥락에서 이토록 예술적인 방법으로, 문학적인 표현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그나마 행복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읽었을 때도, 이번에 다시 재독할 때도 공통적으로 자문하게 되는 것은 부모로서 엘리오의 아버지처럼 ‘너희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드물고 특별한’ 것이라며 위로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엘리오처럼 그 파도를 잘 넘어 무사히 곁에 있어준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덧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 읽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역시나 두 사람과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다시금 그리워지니 후속으로 출간한 <FIND ME>도 다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