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고통의 착즙기처럼 한 방울까지 쥐어짜고 있다는 자각.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젊지만 낡아빠진 기자스러운 다짐은 어쩌면 약자에게 목소리를 빼앗겠다는, 그들의 말을 고르고 편집하여 내보낼 권한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말의 위선적인 버전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본문 중에서
김인정 기자의 <고통 구경하는 사회>는 특정 사건에 대한 진실된 부분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 만약 내가 독자 한 사람이 아니라 같은 기자였다면 그의 글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자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피해자 혹은 약자편에 서야겠다는 마음이 되려 그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처럼 편집하고, 때로는 그로인해 오해를 빚는다면 분명 위의 발췌문과 같은 고민이 반복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을 얻어냈던 것은 피해자들의 아픔에 애도하고 그들의 아픔이 그들만의 아픔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데 있다.
언론이 하는 일은 겪은 이들과 겪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기억의 연결고리가 깜빡이다 꺼지지 않도록 기능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공적인 애도에 대해 적으려면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야기가 때론 이야기에 불과하고, 지나치게 매끈히 다듬어진 이야기는 오히려 해체가 필요할지도 모르며,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위험성을 또렷이 기억하면서. 기억을 듣고, 이야기로 꿰어서, 이해로 마음을 집어넣는 일이 쉬워지면, 슬픔을 나눈 공동체를 상상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262쪽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집필하는 사람과 독자가 늘어나야 하는 이유가 위의 내용에 다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한계와 위험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야기로 꿰어져야 하는 이유는 결국 방식을 달리하더라도 그 이야기안에 내재되어 있는 '슬픔'을 나눌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애도한다라는 것이 낯설지도 어렵지도 않게 될 것이다. '흔한 고통'이 되어버려 더 자극적인 기사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된 산업재해를 바라볼 때 단순히 구매거부에 동참하고 이를 인증하면서 또 다른 차별과 컨텐츠 생산에 치우치지 않으려면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뉴스를 바라보는 데 있어 심각성을 고려할 때 나와의 심리적 거리에 비례하여 그 중요여부를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에도 공감되었다. '멀리 있는 사건이나 타국의 고통이 주목받기 위해 우리와의 연결을 인위적으로 덧붙이는 보도 관행(174쪽)'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발생의 원인과 가해자와 피해자를 현명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미디어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개인이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을 파헤치고 바로잡는 경우도 분명 존재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혹은 이제 검증할 수 없을만큼 쏟아지는 가짜뉴스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올바른 시각을 갖는 것부터가 어쩌면 애도의 시작이지 않을까. 누군가의 고통을 구경하는 것을 넘어 다중적으로 약자를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최소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김인정 2023 웨일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