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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을 켜다
  •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 이수태
  • 15,120원 (10%840)
  • 2021-01-25
  • : 177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완독서평

나는 아직도 완강히 핸드폰 사용을 거부하는데, 누군가는 요즈음은 핸드폰이 없다는것은 예의가 없는 것처럼 취급될 소지가 있다고 넌지시일침을 가한다. 그러고 보니 벌써 세상은 수년 전만 해도 최신품이던 핸드폰 사양을 무슨 골동품처럼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아직 버티고 있다. 이 버팀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버티는 데까지는 버티어보려한다.

이것이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다.

63-4쪽

이 책의 표제가 된<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는 아날로그를고집하는 것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아날로그의 낭만을 놓지 못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 뿐아니라 디지털을 거부하며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집전화에 이어 상대방의 불편으로 인해 아마도 지금은 휴대전화를 보유하고 있겠지만 과거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크게 불편했던 것 같지는 않다.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는 분명 아쉬움을 크게 느끼고 있는터라 나는 초라한 반자본주의 마저 주장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달리기에 관해서도 언급한 부분이 나오는데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법으로 권하기도 한다. 걷기든 달리기든 그 자체에 몰입하다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신체적인 건강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저자의 말처럼 마치 술과 마찬가지로 달린다는 행위자체가 매력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달리다보니 정신과 육신의 이로운 점이 생겨나는 것이지 그 어떤 것보다 달리기를 우선적으로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가하면 헌책방이나 라면집처럼 반자본주의와 제법 낭만적으로 이어진 내용들도 나오는데 이부분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과 감상이 저마다 다를것 같아 생략하도록 한다.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들도 기억에 남지만 안타까운 사연도 등장한다. 알고 지내던 집사님이 가정폭력에 의해 죽을고비를 수차례 넘겼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자녀들의 강권하여 이혼에 이르렀다는데 가정이 해체되는 것을 두고 다행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가정폭력만큼은 어떻게든 함께 살라고 강요할 만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수태저자의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가 맘에 들었던 이유는 읽을 때는 공감하지만 책을 덮는 순가부터 공허해지는 여타의 에세이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시대적으로 또 문학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인문학적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나의‘라고 했지만 결국 ‘우리의‘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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