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나이조

 조카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기 위해 서점으로 향했다. 선물 사는 재주라고는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목적지는 언제나 정해놓기라도 한 양 서점이다. 일단 받아도 기분 좋은 게 책이고, 좋은 책을 고르는 일은 선물을 주는 나로서도 신나는 이벤트니까. 그런데 내가 미혼이고 보니, 아이들 책 고르는 일이 녹록치가 않다. 요즘은 논술이 화두라는데- 아니 이른바 논술비상사태라는데. 그래서 오늘의 미션은 그렇게 정해졌다.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어린이용 책들을 읽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초등학교 학생을 위한 논술책 고르기.

 

목적이 정해져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애들을 위한 논술관련 책이 이렇게 많았던가. 언제부터? 내 경우 대학입시에서 논술시험을 치른 첫세대이면서 중고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친 경험이 있기도 하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내가 받았던 교육도, 그리고 했던 교육도 족집게 과외와 각종 팁들(청유형이나 자문자답은 쓰지 말라는 디테일한 것에서 시작해 엘빈 토플러로 상징되는 천편일률적인 참고도서 리스트까지)의 집합 이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논술 모의고사라도 채점하게 되면 70퍼센트 이상이 서론 첫 문장을 “현대사회는...”으로 시작하게 되는 기현상도 일어난다. 이런 일은, 어딘가 호러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 문제는 독서다. 양서를 많이 읽는 것과, 무엇보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좋은 글을 쓰는 바탕인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어른도 그럴진대 아이들임에랴. 그래서 논술에는 목적의식이 있는 독서가 필요하다. 왜 이 책이 의미가 있는지, 이 독서경험을 어디로 확장시켜야 하는지 늘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유 참 복잡하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은 나보다 복 받았다. 논술 붐에 편승하려는 난삽한 책들도 적지 않지만, 아이들을 지혜의 보고인 고전과 만나게 해주는 꽤 튼실한 가이드들도 제법 찾아볼 수 있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몇 시간이나 서점에서 진을 치다 고르게 된 아이세움의 명작논술 시리즈가 그런 책이다. 일단 선물용이니만큼 깔끔하면서도 깜찍한 디자인이 맘에 들었고, 일러스트도 센스가 있다. 유머러스한 캐릭터들이 북적대는 만화로 시선을 잡아끌고 방향을 제시한 후 본격 독서로 들어가고, 다시 내용을 분석한 다음 본격적인 논술 문제로 들어가는 구성이 꽤 체계적이다. 내 경우 <걸리버 여행기>를 특히 재미있게 보았는데, 그간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만 알려져 있던 이 책의 핵심, 즉 스위프트 특유의 풍자와 풍부한 상상을 드물게 잘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그로테스크한 상상의 세계 라퓨타, 인간의 형상을 한 추악한 괴물 야후-물론 그 대형 포탈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의 진짜 정체를 만나면 상식창고도 풍부해질 것이다.  명작논술 시리즈의 <걸리버 여행기>에 점수를 주고 싶은 이유는 대략 이런 것들.

 

완역본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재구성한 책이라는 점에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이들에게 독서가 어렵고 지루한, 부담스런 경험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대로 그렇게 일단 친해지고 나면, 원전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고 그렇게 두 번의 독서경험을 통해 아이의 세계는 풍부해져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 경험을 미루어 보면 늘 그랬다. 독서의 방향을 잡아주며 무엇보다 재밌다는 점에서, 단점보다 장점이 단연 많이 보이는 책이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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