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내가 뭘 하고 놀겠는가. 여전히 너디한 삘루다가... 최근 1, 2주간 뭐 봤는지 간략 정리.
1. <살인자들의 섬> 데니스 루헤인
Holy crap! 입 한 번 뻥긋해도 다 스포일러라 말 못하는 게 유감이다. 존엄한 옥체에 떡 하니 붙어있는 보지 않는 게 더 좋았을 당나귀귀 나부랭이와 조우하고 만 신라 경문왕의 이발산지 뭐시긴지의 마음을 이해하겠다. 사람 죽이는군 정말. 별 네 개 반.
우습게도-아니 우습다고까지 할 일도 아닌데-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책들 중 많은 것이 장르소설이었다. 내게는. 얘기는 이렇게 만드는 거다.
2. <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이미 썼지만.. 언니 사랑한다니깐요. 내가 사랑해! (그리고 적립금 감사합니다 알라딘. 가난한 백수입니다)
3. <알리바이> 에드 맥베인
대체가 일본판 중역이라는 사실을 전혀 숨기려고도 하지 않으니 용감하다고 해야할지.... 중역의 폐해를 알고 싶으면 이걸 읽어라. 이끼 핀 툇마루 밑처럼 칙칙한 표지부터 불길하더라니... <경찰혐오자>를 비롯해 87분서 시리즈의 팬임에도 도저히 읽을 수 없어서 포기. 지금도 새삼 표지의 카피를 보면서 좌절중이다. "세계명작추리소설공포여행"은 다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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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몇 줄 소개:
그리고 나서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서로가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그만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자기가 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버리겠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경우냐? (-_-;;) 그렇지 않아 앤디. 나는 이런 짓을 그만두자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만두다니 뭘? 널 사랑하는 것 말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니? 너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 살지 말아버려! 젠장할) 앤디는 죽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너도 똑같아!) 그는 옷을 벗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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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랄... 무슨 암호 같지 않은가. 이미 중역의 문제를 넘어서 있는데 그런 구절이 주택가 음식물 쓰레기 수거지에 널린 여름날의 수박껍질처럼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Fuck you very much.
4. <법의관> 패트리샤 콘웰
길게 말할 거리는 없는 책이지만 재밌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때도 잘 읽히는데, 동성의 작가가 쓴 소설을 읽을 때의 일종의 이점이랄까 그런 것을 느끼게 한다. 공감대라고 세 글자로 쓰면 촌스러워지는 것.
5. <십자군 이야기 2 > 김태권
동생이 샀기에 몰래(?) 집어다 읽었다. 우직하고 재미있는 한편 1권보다 말장난은 좀 늘었다. 엄청난 레퍼런스들이 권말과 중간중간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 중 대학 때 수업 들었던 강철구 교수도 있었다. <문명의 충돌> 레포트 냈던 생각도 나고. 그 수업 C였지 (먼 눈) 여튼 이 책의 한 가지 흠은 너무 늦게 나온다는 것. 동생한테 "1년도 훨씬 더 걸리는 것 같다"고 불평했더니 자기 고 2때 1권 나왔으니까 햇수로 3년이란다. 음.
6. 비디오: <밀리언스>
뉴욕 타임즈의 한 리뷰에서는 대니 보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좋은 훅과 기억에 남고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비트의 힘을 알고 있다. 마치 좋은 뮤지션처럼." 멋진 평 아닌가. 이런 리뷰어들을 좋아한다. 이것 저것 차치하고라도 정말로 더 잘 이해하게 만들어주니까.
나로서도 대니 보일을 좋아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이클 윈터바텀의 <24시간 파티 피플>의 각본가였던 머시기씨-이름 까먹었다. 생면부지의 서양남자 이름들을 줄줄이 머릿속에 담고 있기에 난 너무 늙었다고. kiddo-와 손잡고 만들어 낸 <밀리언스>는 착하고 예쁜 영화지만, 그 안에는 확실히 대니 보일의 경박하리만큼 뚜렷한 지문들이 눌러져있다. 성자를 보는 데미안의 순수하다 못해 청승맞은 환상들을 보라. 죄책감에서 출발했음이 너무도 명백한, 마크 렌튼의 '목돌아가는 아기' 환각은? <쉘로우 그레이브>의 돈가방과 <밀리언즈>의 돈가방이 가져오는 전혀 다른 결과를 서로 비교해보는 건 어떤가.
공포, 환각, 모 아니면 도, 낙천주의가 만들어내는 어딘가 서글픈 웃음-나는 지금 <트레인스포팅>의 유명한 마지막 나레이션을 떠올리며 이 말을 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난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난 달라질 거다. 삶을 선택하고,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를 선택하고, 나인 투 파이브를 선택하고, 퍽킹 빅 텔레비전을 선택하고..." choose life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울림이 얼마나 쌉쌀한가. 그 흥겨운 비트에도 불구하고 이건 언제라도 울증으로 돌면할 수 있는 일종의 조증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뭐 그런 것들이 대니 보일의 세계. 나는 심오하지 않아서 그 사람 영화가 참 좋다.
7. 비디오: <미스터 히치>
재밌다! 에바 멘데스와 윌 스미스의 건강한 섹시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이거.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좋겠다 -_-* 근데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으로는 윌 스미스는 상당히 철자나 어법 등에 집착하는 사람이란다. MIT 재학 때의 별명이 '교정왕'이었다나. 아유 귀여워라.
8. 만화: <그린빌에서 만나요 2> 유시진
좋다. 좋음에도, 유시진의 만화 중 가장 덜 좋아하는 것이 되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다. 이비, 이언 남매에 정이 안 가는 게 제일 문제다. 주인공도. 하지만 유시진과 강경옥은 언제나 나의 투톱!
9. 만화: <맛의 달인> 89, 90, 91
1) 맛의 달인에서 처음 보는 남자와 처음 보는 여자가 등장하면 둘은 반드시 결혼한다.
2) 젊은 나이에 출세한 남자에게는 소박한 가정요리를 권해라. 아버지와 딸이 사이가 나쁘면 아버지에게 요리를 시켜라. 장래를 결정하기 힘들면 요식업계로 가도록. 왜냐면 바른 먹거리야말로 밝은 미래의 첩경이니까.
3) 자고 일어났더니 맛의 달인의 세계로 들어가버렸다? 그 때를 대비해 간단한 회화를 익혀두자.
동서신문사를 방문할 경우: 문화부 기자 지로는 게으름뱅이 월급도둑이라고 말하라.
까다로운 모임을 끝내고 싶을 경우: 후쿠이 차장에게 술병을 쥐어주라. 틀림없이 타이를 머리에 매고 바지를 벗어 확실히 자리를 파토내줄 것이다.
카라스미 등등 비싼 재로료 만든 요리가 나올 경우: 대사 두 개만 외워두길. "이거 사치스럽군" "어른의 맛이에요"
나머지는 생각나면 더.
10. <식객 1> 허영만
재미없었다. 허영만 선생님은 멋있는 분인데다 전에 뵈었을 때 내게 예쁘다고 말해주셨지만. (슬쩍 자랑)
11.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
Holy crap! (2;;) 시청자의 기대를 계속 배반하는 주인공들과 노니는 즐거운 양가감정. 나레이터가 자살한 메리라는 점에서부터 그 묘하게 약먹은 것 같은 몽롱한 분위기 하며, 죄의식을 느끼되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대단히 색다른 경험. 늦게야 보기 시작했지만 다른 이들의 열광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위기의 주부들>에 대해서는 이번 주 [한겨레21]의 평이 읽을만 했다. 특히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보다 성경적으로 올바르고자 하는' 보수주의자 브리에 대한 분석-비판과 옹호가 동시에 존재하는- 등은 아주 좋았다.
12. <공중곡예사> 폴 오스터
"만일 내가 그것을 몰랐다면 나는 바보 멍청이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결국 내가 그들에게 길이 들었다는 얘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마침내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되는 것처럼." 폴 오스터의 소설은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다. 이 '미스터 버티고'가 다른 것들보다 더 이상한지 아니면 덜 이상한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무척 독특한 것만은 확실하며, 이 사람에 한해서는 내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알겠어요 그런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