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가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꿈은 기를 쓰고 꾸며낸 어떤 영화나 만화보다 완벽한 개뻥이기 때문이다. 엑스포 마스코트 꿈돌이가 그렇게도 막연하고 추상적인 외양을 가진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상에 대한 요구의 최종적인 목적은 대상과 결합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타인의 태도를 확증하는 것"이라고 지젝선생도 쓰셨던 바, 꿈은 어떤 것도 실체화되지 않은 개뻥이다. 숙변처럼 고스란히 몸 속에 쌓여 유독한 가스를 만들어낸다. 세상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은 모든 종교가 주창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먹기에 따라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는 제 1요소는 바로 꿈이다.
<어제>라는 소설을 걸작이라고 평하긴 뭣하지만, 이건 숨쉬기 힘든 사람들의 호흡을 닮아있는 소설이다. 정말이지 그렇다. 토비아스는 하루 열 시간 씩 공장에서 나사를 조이며-이 부분은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듯 한데- 어린날의 친구이자 실은 이복동생인 린을 꿈꾼다. 린은 토비아스가 꿈꾸는 다른 삶 그 자체를 표상하는 존재다. 린과의 재회-비록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지만-는 토비아스에게 만개한 절정의 순간이자, 꼭대기에 올랐기에 앞으로는 굴러떨어질 수 밖에 없는 파멸의 시작점이다. 먼 곳에서 단지 그려만 보던 린은 완벽한 이상의 여인이었지만,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토비아스의 마음은 응집되고 또 응집되어 단 한 문장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이제 매일밤 그녀가 남편 곁에서 자는 꼴을 보는데도 신물이 난다." 픽션 속에서 만난 그 어떤 것보다 무섭고 절절한 사랑의 토로.
사랑을 잃고 꿈을 버린 주인공의 에필로그는 건조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바수어져 사라질 것 같은 일곱개의 문장이다. 글을 쓰지 않는 토비아스는 공장의 다른 노동자들과 어떤 변별점도 가지지 못하는 셈이다. 아니 변별 따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 속에만 존재하던 마지막 끈 하나, 다 썩은 시체를 매장했을 뿐이다. "카롤린, 넌 날 그렇게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근본은 같아." 영원히 입밖에 내어보지 못한 비밀만이 동반자가 되어 함께 무덤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꿈을 가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딱 짝사랑의 풍요로움만큼 행복한 하루하루가 간다.
..........
카롤린이 떠나고 이 년이 지난 뒤, 내 딸 린이 태어났다. 일 년 뒤, 내 아들 토비아스도 태어났다.
우리는 아침마다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겼다가 저녁이면 데려온다.
내 아내 욜란드는 아주 모범적인 엄마다. 나는 여전히 시계공장에서 일한다.
첫번째 마을에서는 버스를 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