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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 시리즈가 새로운 표지로 재간행되었던데, 나귀님 눈에는 20년 전 구판 표지보다 오히려 더 못나지지 않았나 싶었다. 내친 김에 오래 전 사다만 놓고 들춰본 적 없었던 구판 전9권을 이참에 다 읽고 내버려야겠다 싶어 하나씩 꺼내 읽으며 중간중간 마주친 오역과 수정 사항을 정리하는 중인데, 이게 의외로 꽤 재미있는 소설이다!


여성 작가가 쓰고 소녀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만 놓고 보면, 석판 들고 사람 패는 '빨갱이'가 나오는 또 다른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로맨스 소설이 아닐까 넘겨짚었는데, 실제 내용은 <로빈슨 크루소>에서 파생된 '로빈슨계 소설'의 숱한 하위 장르들 가운데 하나로 <스위스의 로빈슨 가족>에서 시작된 '가족 로빈슨' 계열의 모험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게 보인다.


19세기 미국 중부에 맨몸으로 넘어온 개척민 일가가 숲과 평원과 마을로 옮겨 다니며 오두막과 판잣집을 짓고, 채집과 사냥과 농사로 식량을 마련하며, 각종 필수품을 직접 만들거나 흥미로운 대체품을 찾아내고, 들불과 홍수와 폭설과 굶주림과 해충과 맹수와 강도 같은 갖가지 위험을 헤쳐 나가는 내용이니, 이것만 놓고 보아도 충분히 훌륭한 모험 소설인 셈이다.


특히 남성 독자라면 특히 제5권인 <소년 농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간행 순서로는 두 번째이지만 여주인공의 서사에 더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지금은 다섯 번째로 밀려났다는 '친숙한' 작품 외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주인공이 속한 중부 개척민 가족과의 생활과는 매우 다른 동부 농민 일가의 생활을 흥미롭고 자세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가리키는 아홉 살 '소년 농부'는 일찍부터 부모를 도와 농사를 거들며, 언젠가는 멋진 망아지를 직접 길들여 보겠다는 포부를 품는다. 고사리손에 불과했던 아이가 갖가지 시행착오와 경험을 거듭하며 점차 어엿한 일꾼으로 인정받는 과정을 서술하는데, 농업과 목축뿐만 아니라 목공과 각종 허드렛일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예를 들어 제24장 "작은 썰매"에서는 주인공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자기 썰매를 만드는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썰매란 놀이용이 아니라 무려 통나무 운반용이다. 제27장에 가서 주인공은 이때 만든 썰매에 송아지 두 마리를 묶어서 눈밭을 오가며 통나무를 나르고, 처음에는 실수도 많았지만 나중에는 능숙해져서 아버지에게 칭찬을 듣게 된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인물은 주인공의 아버지로, 시종일관 엄격하면서도 의외로 현명한 인물이다. 작품에서 드러난 그 경제적 사고방식은 지극히 원칙적이어서 이른바 '청교도 윤리'의 파생물인 듯 보이기도 하는데, 주가가 출렁일 때마다 원금이 녹아내리고 정책을 수정할 때마다 집값이 상승한다는 오늘날의 복잡한 경제 상황에선 의외로 신선하기까지도 했다.


예를 들어 마을 축제에서 5센트짜리 음료수를 선뜻 사는 사촌이 부러웠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그 열 배인 50센트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한다. '50센트면 돼지 새끼 한 마리 가격이다. 돼지를 사서 기르면 훗날 10배인 5달러를 벌 수 있겠지. 음료수를 사 먹든, 돼지를 사 기르든, 네가 알아서 해라.' 아들은 고심 끝에 돼지를 사러 간다.


또 노점에서 야바위꾼의 현란한 손놀림을 보고 감탄한 아들이 그 원리가 무엇인지를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도 몰라. 하지만 그 사람은 알고 있지. 그건 그 사람의 장기야. 다른 사람은 도저히 이길 수 없어. 그런 데 돈을 걸면 절대로 안 돼."(258쪽) 최근 중고생 사이에서도 인터넷 도박 중독이 늘어난다니, 이 책을 필독서로 지정해야 할 법하다.


축제에서 경마가 벌어지자, 다른 사람들이 돈 거는 것을 지켜보며 아들에게 이렇게도 말한다. "경주에 돈을 걸면, 돈을 낸 만큼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지. 하지만 나는 만족감보다 좀더 실질적인 것을 얻고 싶구나."(264쪽) 나중에 아들이 남의 지갑을 주워 찾아주고 받은 사례금 200달러를 난생 처음 은행에 넣고, 돈을 찾는 방법을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도 말한다.


"돈을 달라고 하면 내줄 거야. 하지만 이 점을 명심해라. 그 돈이 은행에 있는 동안은 너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은행에 1달러를 넣어 두면 1년에 4센트를 벌 수 있지.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쉽게 돈을 벌 수 있어. 5센트를 쓰고 싶으면, 돈을 쓰기 전에 우선 이걸 생각해 봐. 1달러를 벌려면 일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알겠니?"(361쪽)


물론 AI가 거리를 배회하고 ETF가 파도에 넘실거리는 지금의 상황과는 안 맞는 케케묵은 원론적 사고방식일 뿐이라고 폄하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갖가지 생존의 기술을 회고하는 이 시리즈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평생 땅을 일군 저 아버지의 조언 역시 우리가 어느새 망각해 버린 지혜를 상기시키지 않나 싶어 해 본 말일 뿐이다.



[*] 제5권의 대표적인 오역으로는 "단풍 시럽을 굳힌 커다란 갈색 덩어리"(large brown cakes of maple sugar)를 "단풍 시럽을 넣은 갈색 케이크"(31쪽)로 오역한 것이 있다. 그 외에 본문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체불명의 "교반기" 삽화(202쪽) 문제도 있는데, 과연 이것이 삽화가 가스 윌리엄스의 잘못인가 아닌가를 놓고 해외의 "초원의 집" 애독자들 사이에서 지금껏 논란이 지속되는 모양이다.(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든가 말든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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