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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며칠 전 알라딘에서 <완서학의 정동들>이라는 책의 북펀드 광고가 나오기에, '설마, 아니겠지' 싶은 미심쩍은 마음에 클릭해 보았더니만,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거'라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년 전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 세계를 설명한 학자들의 공동 연구서인 모양인데, 나귀님이 보기에는 '완서학'이라는 명칭이 영 어색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거다.


이런 식의 명칭은 유학에서 독자적인 학파를 수립한 경우에나 해당하는데, 옛부터 명(名: 이름)은 부모만 부를 수 있고 나랏님조차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기피[諱] 원칙에 따라, 동료와 제자가 부르던 명칭인 호(號)에 '-학(學)'을 덧붙인다고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학', '이학', '식학'이 아니라 '퇴계학', '율곡학', '남명학'이라는 명칭이 있는 것이다.


박완서는 생전에 호(號)가 따로 없었으니 명(名)인 '완서'에 '-학'을 붙인 모양이지만, 앞서 말했듯 명(名)이나 자(字)를 기피하는 일반적인 원칙에는 어긋난다. 이제 와서 유학의 그런 원칙을 굳이 따를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도 나올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박완서 연구'로 충분할 법한 작업에 굳이 '-학'을 갖다 붙인 것부터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과연 박완서의 작품 세계가 국문학 분야에서 별도의 '학'을 수립할 만큼 독보적이었냐는 의문도 제기해 볼 만하다. 동시대 작가로서 충분히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이문구나 박상륭만 해도 사후 전집이며 연구서는 간행되었지만 '문구학'과 '상륭학'은 없다. 여성 문학으로 좁혀 봐도 '경리학'이나 '혜석학'(영어로 hyermeneutics?) 역시 없다.


물론 나중에 가서 '강학'이나, '한강학'이나, '노벨부커한강학'이나, '한국최초노벨문학상수상추카추카한강학'이 나올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코미디언 이경규의 말마따나 '과분한 칭찬은 결국 엿 먹이기'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생전에 남긴 에세이에 드러난 평소의 소박한 성격대로라면 고인조차 '완서학'에 손사래를 치고도 남지 않을까.


여기서 문득 고인이 언젠가 남영역에서 오도가도 못했던 사연을 털어놓은 에세이가 생각난다. <세상에 예쁜 것>에 수록된 "나는 누구일까"라는 에세이인데, 원래 <법보신문>에 기고한 칼럼이었는지, 현재 해당 매체의 사이트에서도 원문을 읽을 수 있다.(그런데 정작 거기에는 제목이 "나는 구구인가"로 잘못 나와 있어 '박완서의 굴욕' 시리즈의 연장이 되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하루는 지인과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서울 시내에 왔는데, 뒤늦게야 핸드백 안에 지갑도 휴대전화도 없음을 깨닫고 당황했다는 것이다. 노인 무료 승차권을 얻으려 해도 신분증조차 없으니, '나를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나'를 놓고 한참 동안 실존적인 고민에 빠졌다는 것이다.(결국 '이뭣고' 화두의 연장이라 불교 신문에 기고한 걸까).


문득 저자는 가끔 독자가 자기를 알아보고 말을 걸던 것이 기억나서, 혹시나 이곳에도 자기를 알아볼 사람이 있다면 돈이나 전화를 빌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남영역에서 목을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생전에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사후에는 새로운 '학'의 주인공이 된 유명인인데도, 숱한 행인 중 누구도 끝내 알아봐주지 않아 좌절한다.


지금 와서는 웃음을 자아내는 실수담이지만, 이미 유명 작가였던 박완서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여전히 작은 존재임을 실감하며 새삼스레 겸허한 마음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 민망한 경험을 털어놓은 것 역시 고인의 소박함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라고 치면, 아무리 흠모의 마음이라도 '완서학'은 과하지 않나 싶어 한 마디 해 보는 것뿐이다.




[*] "박완서 칼럼 - 나는 구구인가", <법보신문> 2004년 8월 10일자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6541)


박완서의 다른 여러 '굴욕' 중에는 컴퓨터가 바이러스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옆에 놓인 디스켓도 감염될까봐 얼른 치우다가 수리 기사에게 바보 취급 당한 일, 역시나 같은 수리 기사에게 자기가 컴퓨터로 글 써서 돈 번다고 자랑했다가 '타자 빠른 젊은 사람도 수두룩한데 할머니한테까지 입력 일거리가 돌아오느냐'는 반문을 들은 일, 트럭 몰고 다니는 과일 장수에게 '빈곤 아동 수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 버금가는 좋은 책 많이 쓰세요'라는 덕담을 들은 일, 택배 오배송에 항의했다가 한밤중에야 배달을 온 젊은 택배 기사에게 핀잔을 들은 일, 또 다른 수리 기사에게 뭘 물어보았다가 '당근이죠' 하는 답변을 듣고 영 이해를 못했다가 뒤늦게야 그게 '당연하다'의 은어임을 깨닫고는 새삼스레 당근의 처지를 걱정한 일, 딸들에게는 맥주를 잘만 따라 주면서 마누라가 한 잔만 달라고 애원해도 항상 거품만 부걱부걱하게 조금 따라주는 남편에게 영 서운했던 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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