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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미국 작가 제임스 그레이디의 <콘돌의 6일>(1974)은 냉전 시대 첩보 소설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분야의 고전인 이언 플레밍이나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주요 작품이 적국이나 테러리스트 같은 외부의 적에 맞서 싸우는 엘리트 스파이의 활약을 보여주는 반면, 그레이디의 작품은 누명을 쓰고 내부의 적과 싸우는 평범한 주인공을 등장시켰다는 점이 특이했다.


어느 날, 워싱턴 DC 소재 CIA 산하 조직 사무실에 괴한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한다.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암호명 "콘돌")이 비상 연락망으로 피습 사실을 보고하지만, 상황을 수습하러 나타난 연락관은 오히려 그에게 총을 겨눈다. 가까스레 도망친 "콘돌"은 CIA 수뇌부가 자기네 부서를 숙청했음을 깨닫고, 조직의 추적을 피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려고 분투한다.


충성을 바친 조직에게 갑자기 배신당해 고립되고 추적당하는 첩보원이라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오늘날 각종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숱하게 반복된 클리셰인 듯하지만, 사실은 <콘돌의 6일>이야말로 그 원형을 제시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전 경험이 사실상 전무한 책상물림인 주인공이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는 모습이 각별히 흥미와 공감을 자아낸다.


소설 <콘돌의 6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영화 <콘돌의 3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원작의 "6일"을 "3일"로 압축하는 등 각색이 이루어졌지만, 시드니 폴락 감독에 로버트 레드퍼드와 페이 더너웨이 주연으로 1975년 개봉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기에, 오늘날에는 "콘돌"이라면 소설보다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이 훨씬 많다.


사실은 나귀님도 소설보다 영화를 더 먼저 봤다. 우리나라에서는 <콘돌>이라는 제목으로 1990년에 예술 영화 상영을 표방하던 호암아트홀에서 개봉했는데,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수입이 금지되어 제작된 지 15년이 지나서야 개봉했다는 사실 때문에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다. 물론 나귀님은 극장에서가 아니라 나중에 <토요명화>인지 <주말의 명화>인지로 봤지만.


그 즈음에는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의 이미지로만 굳어버린 레드퍼드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도 특이했고, 더너웨이의 미모도 매력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살인청부업자 역할의 막스 폰 시도("멀린!")였다. 물론 도입부에 레드퍼드의 애인(?)으로 나와서 한자를 써주며 꽁냥꽁냥하는 중국계(?) 여성도 기억에 남았지만.


소설에서는 처음부터 CIA 산하 조직임을 자세히 설명하고 들어가는 반면, 영화에서는 피습 직후 비상 연락망 가동을 통해서야 주인공이 속한 사무실의 성격이 천천히 드러나기 때문에 느낌이 많이 다르다. 즉 "3일"과 "6일"의 차이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적에서 제법 차이가 있으니, 영화를 먼저 본 사람이라도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역시 흥미로울 것이다.


소설과 영화 모두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제임스 그레이디는 1976년에 속편 <콘돌의 그림자>를 간행했고, 무려 40년 뒤인 2014년부터 "콘돌"이 등장하는 단편을 재발표하기 시작해 2015년에 장편 <콘돌의 마지막 날들>을 간행했다. 번역서로는 <콘돌의 6일>과 <콘돌의 마지막 날들>(단편 "콘돌의 다음날"도 수록)이 오픈하우스의 '버티고' 시리즈로 각각 간행되었다.


<콘돌의 6일>의 권말에는 저자가 작품 집필 과정과 후일담을 소개한 후기가 30페이지 넘게 수록되어서 흥미를 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속한 CIA 산하의 간행물 검토 부서는 저자의 순수 창작이었지만, 이 소설을 본 KGB에서 이를 실제라고 착각한 나머지 그 구조와 기능을 똑같이 모방한 부서를 만들었다는 후일담은 냉전 시대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 주는 일화다.


단편 "콘돌의 다음날"과 <콘돌의 마지막 날들>은 "6일" 이후로도 CIA에서 일하다 퇴직한 주인공이 백발 노인이 되어 새로운 위협과 음모에 휘말리는 내용이다. 이미 깔끔하게 마무리된 "6일"에 덧붙인 사족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단편 말미의 "할란 엘리슨을 위해"라는 헌사를 보면 저자에게 "콘돌" 후속편을 독촉했던 사람들이 일반 독자 외에도 꽤 많았던 듯하다.


그나저나 오래 전 중고로 구입해 줄곧 묵혀 놓았던 이 책을 지금 다시 읽게 된 계기는 역시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의 타계 소식 때문이다. 사실은 작년 가을에 마루에서 무너진 책더미를 정리하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는 '내가 이걸 왜 여기 두었나?' 싶어서 다른 곳에 정리하려고 빼 놓았는데, 희한하게도 바로 다음날에 타계 소식을 접했다.


폴 오스터 같으면 내친 김에 책이라도 한 권 썼을 법한 우연의 일치인데, 막상 레드퍼드에 대한 추모 글을 하나 쓰려다 보니 이후 다이앤 키튼이며 캐서린 오하라며 이순재와 안성기까지 국내외 영화배우 사망 소식이 줄줄이 이어지며 뭘 먼저 써야 하나 차일피일하다 말았다. 결국 "콘돌"도 꺼내만 놓고 해를 넘겨 버렸다가, 며칠 전에야 작정하고 읽어치운 거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만 생각해 보니, 레드퍼드의 영화 중에 나귀님이 본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일단 <내일을 향해 쏴라>(1969), <스팅>(1973), <추억>(1973), <대통령의 사람들>(1976),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등이 떠오르는데, 하나같이 공동 주연들의 호연이 더 돋보이던 작품들이다 보니, 레드퍼드의 대표작이라 하기에는 오히려 힘들지 않나 싶기도 하다.


버나드 맬러머드의 소설을 각색한 <내추럴>(1984), 전성기의 데브라 윙어(!)며 초창기의 대릴 해나(!)와 함께 나온 <리갈 이글>(1986), 존 디디온과 존 그레고리 던이 각본을 썼지만 오히려 셀린 디온의 주제가가 더 유명한 <업 클로즈 앤 퍼스널>(1996)도 있지만, 흥행 성공과 별개로 레드퍼드의 연기가 돋보이거나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들까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니 나귀님으로선 거꾸로 <콘돌>(1975)을 보고 나서야 레드퍼드의 연기를 (물론 액션은 빼고) 진지하게 평가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메릴 스트립의 경우에도 유명 흥행작들에서는 별 느낌이 없었다가, 뒤늦게야 <실크우드>(1983)를 보고 그 탁월한 연기력을 실감했던 것과도 비슷하다고나 할까.(물론 이때도 조연으로 나온 셰어의 연기가 더 돋보이기는 했지만).


여하간 레드퍼드의 영화와 연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 없는 나귀님이다 보니, 결국 "콘돌"을 핑계 삼아서야 간신히 그에 대한 추모글을 작성하게 된 셈이다. 물론 굳이 쓰려면야 <아웃 오브 아프리카>, <대통령의 사람들>, <내추럴>의 동명 원작이며 <스팅>의 원작인 <빅콘 게임>을 들먹였어도 상관없었겠지만, 그래도 아직 못 읽은 책은 바로 "콘돌" 시리즈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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