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미디언 전유성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보니, 예전에 사다 놓은 책들 중에 그의 인터뷰집도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원래 꽂아 두었던 옥탑방 계단 책장에는 없는 것 같았으니, 마루의 버릴 책더미에 섞여 들어갔는지 어쨌는지 몰라 차마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며칠 전 옥상 올라갔다 내려오며 살펴보니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이 책은 그의 인터뷰집도 아니고 무려 남이 그에 대해서 쓴 책이었다. 말하자면 "인물 평론"이라고나 할까. 제목부터 <전유성론>(신동호 지음, 형상, 1997)인데, 부제가 "디오게네스와의 희극적 만남"이다 보니 언제부턴가 대담집이라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터뷰가 전혀 들어 있지 않고, 그의 저서 위주로 참고하고 인용해서만 쓴 책이다.
"형상대중문화총서"의 제1권인 이 책의 뒷날개를 펼치면 전유성, 주철환, 이현세, 강우석에 관한 책 네 권이 한꺼번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1990년대 후반에 주목받은 대중 문화 인물에 대한 평론 시리즈라고 해야 맞을 듯한데, 심지어 알라딘에도 서지 정보가 등록되었지만 근간 예정되었던 김수현, 박중훈, 산울림에 관한 책은 결국 간행이 불발된 듯하다.
특정 코미디언에 대한 평론서라고 하니 그 출간 자체에서 의의를 찾을 수도 있어 보이지만, 사실 자료로서는 가치가 별로 없다고 봐야 할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내용을 발굴한 것도 아니고, 기존 저서를 활용했지만 정확한 출처 표시까지는 없고, 해당 인물의 구체적인 이력에 대한 서술도 없이 저자가 받은 인상만 나열한 정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코미디언에 대한 평론서라면 선례도 없지는 않다. '코미디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이주일을 소재로 한 <삐딱한 광대>라는 책이 있기 때문인데, 신문 연예부 기자 둘이 공저해서 이주일의 등장이 당시의 사회에 던진 파장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특히 당시의 주요 신문 기사를 전재한 내용이 대부분이라, 지금 와서는 자료로서 오히려 유용해 보인다.
인기 연예인의 에세이나 자서전이야 예나 지금이나 흔한 편이지만, <삐딱한 광대>처럼 남이 써준 전기나 평론은 드물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성격의 평론서라면 "최진실 신드롬"을 다룬 것과 드라마 <애인>을 다룬 것이 생각나는데, 양쪽 모두 가히 사회 현상이라고 일컬을 만큼의 인기와 영향이 있었던 사례이니 충분히 단행본 형식의 평론이 나오고도 남을 만했다.
이에 비하자면 전유성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점은 상당히 이례적일 수밖에 없으니, 최근 그의 부고 기사에서도 반복해서 언급했듯이 오랜 이력에도 불구하고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활동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책이 나온 당시에는 무대 위보다 오히려 밖에서의 활동으로 더 주목을 받으면서 명성이 오르면서 결국 재평가의 대상이 되었다고 봐야 할 법하다.
지금도 인기 좀 얻었다는 코미디언이라면 에세이를 한두 권 내기도 하는데, 전유성은 컴퓨터 입문기와 해외 여행기 등 다양한 주제로 저서를 펴내 주목을 받았고, 카페 운영 등의 사업도 병행하면서 뒤늦게야 그 팔방미인다운 역량이 주목받은 경우였다. 그의 대표 방송을 꼽아 보라면 대부분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처럼 무대 밖의 명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코미디언 후배 홍윤화가 선배 김영철을 향해 '너는 이놈아 코미디언인데 남을 웃기지는 못하고 영어만 잘 한다니 말이 되니?' 하고 엄마 잔소리 버전으로 내놓았던 '디스'라든지, <무한도전> 시절 정형돈이 받았던 '웃기는 것 빼고 다 잘 하는 개그맨'이라는 평가는 사실 전유성에게도 비슷하게 적용가능해 보인다. 어찌 보면 한계이기도 했지만 특징이기도 했다.
전유성이라면 '코미디언'과 구분되는 '개그맨' 1세대로 분류되고, 특히 그 명칭의 창안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나귀님 기억에는 1980년대에만 해도 전유성과 고영수 가운데 과연 누가 '개그맨'의 원조인지를 다루는 기사가 여러 건이었다. '개그맨'이란 명칭의 고안자는 전유성이지만, 방송에서 스스로를 '개그맨'으로 소개한 사람은 고영수라고 했었던 모양이다.
나귀님 생각에 '코미디언'과 '개그맨' 구분의 기준은 이른바 악극단 경력 유무가 아닐까 싶다. 과거의 코미디언은 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방송국에 정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후에는 악극단 경력 없이 방송국에서 선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악극단 출신으로 방송국에서 포텐을 터트린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은 이 두 가지 흐름의 전환점에 해당한다.
물론 '개그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콩글리시 논란이 줄곧 따라다녔으니, 대표적인 비판자가 번역가 안정효였다. <가짜영어사전>에서 '개그 콘서트'는 '구역질 공연'이라는 뜻일 뿐이라며 과격한 비판을 쏟아냈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심슨 가족>의 도입부도 '소파 개그'(couch gag)로 지칭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안정효 쪽에서 오해를 하지는 않았나 싶다.
역시나 '개그맨' 1세대로 꼽히는 고영수만 해도 뛰어난 언변으로 방송에만 나왔다 하면 무대를 쥐락펴락했었지만, 전유성은 항상 조연으로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다 마는 수준이었으니, 제아무리 배후의 기획자로 뛰어났다 하더라도 그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는 나귀님으로서는 언제부턴가 '코미디의 대부'로 평가되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또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훨씬 더 잘 나갔던 심형래나 임하룡 같은 주연급이 방송에서 모습을 감춘 뒤에도 전유성만큼은 꾸준히 등장했었으니 역전인 셈이다. 그 다음가는 '대선배'인 이경규만 해도 5인조 (김창준, 조정현, 김정렬, 이경규, 김보화) 중에서는 오히려 처지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전유성 장례식에서 '숭구리당당' 춤을 춘 김정렬이 누군지 모를 사람이 더 많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유성이라면 코미디보다는 오히려 책으로 더 성공한 코미디언인 동시에, 실제로도 책을 좋아한 것처럼 보인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과거 <무한도전>에서 독서에 관해 다루면서 (아마도 하하의 "오펜하이머" 독후감이 나온 회차가 아니었나 싶은데) 방송국 구내 서점에 관찰 카메라를 설치했더니, 가장 많이 찍힌 사람이 바로 전유성이었다.
어쩌다 한 번 들른 것도 아니고 거의 매일같이, 심지어 하루에도 여러 번 들러서 새로 나온 책을 뒤적이는 모습이 찍혔고, 서점 주인 말로도 단골 손님이라 했으니, 이래저래 남다른 사람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조동아리" 유튜브에 나온 코미디언 이홍렬의 증언에서도 책에 대한 전유성의 애정과 아이디어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나왔었다.
이홍렬이 후배들을 위해 무슨 좋은 일을 해볼까 고민하자, 전유성이 대뜸 '지금까지 코미디언이 쓴 책들만 한 자리에 모아 보라'고 제안했다는 거다. 이에 이홍렬이 무릎을 탁 치며 책을 수집하는 동시에, 그 활용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남산시립도서관에 무작정 찾아가서 부탁했더니만, 결국 내부에 '코미디언 서가'라고 별도의 컬렉션을 만들어주기로 했다는 거다.
도서관 중에는 특정 주제나 인물에 관한 문고(컬렉션)를 별도로 운영하는 경우가 있으니, 잘만 하면 '코미디언 서가'도 대중 문화 분야에서 특이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을 담당할 만하다. 물론 코미디언의 저서 대부분은 <전유성론>처럼 자료 가치가 미미할 수 있지만, 훗날 누군가가 한국의 코미디 역사에 대해서 연구하려 하면 나름대로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유튜브에서 해당 회차를 찾아보니, 이미 지난 여름에 '코미디언 서가'를 열었다고 한다. 남산 도서관 웹사이트에서 '큐레이션 > 북큐레이션 > 코미디언 서가' 메뉴로 들어가 보니 김영철의 영어 교재며, '옥동자'의 요리책이며, 심지어 개그맨 출신 치과의사이며 사랑니 전문가인 김영삼의 <(쉽고 빠르고 안전한) 사랑니 발치>라는 전문서까지도 망라되어 있었다.
다만 그 숫자가 적어서 아직 100권이 못 되는 초라한 모습인 듯하고, 전유성의 책은 다 있지만 <전유성론>은 없으며, 그나마도 현역 코미디언 위주이다 보니 나귀님이 소장한 구봉서, 남보원, 이주일의 저서 같은 것은 없다. 지난번 유튜브를 보고서도 기증을 해 볼까 하다가 어디 연락해야 할지 몰라 포기했는데, 이번 기회에 도서관에 연락해 볼까 싶기도 하다.
물론 작년에 집 근처 작은 도서관에 비매품 도서를 기증하려고 연락했더니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이어서 결국 헌책방에 처분하고 말았던 것을 기억하자면, 애초부터 남 좋은 일일 뿐인 기증 따위 생각하지 말고 제값에 매각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이주일 책도 희귀본이지만 중고 가격이 몇만 원 수준인데, 생각이 있다면 연예인들이 그것 하나 못 샀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