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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 나온 모양이다. 그의 에세이는 좋아해서 대부분 갖고 있지만 소설은 장편이건 단편이건 영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나귀님인데, 제목이 특이해 보이기에 혹시나 지난번 단편집인가의 제목을 슬그머니 따라했던 것처럼 헤밍웨이나 뭐 비슷한 작가의 흉내인가 싶어 클릭해 보니, 오랜만에 나온 재즈 에세이라기에 호기심이 동했다.


제목에서 가리키는 인물은 유명한 재즈 음반의 표지 그림을 담당했던 삽화가라는데, 표지를 확대해 보니 만화와 수채화를 섞은 듯한 그림체가 확실히 눈에 익은 느낌이었다. 바로 구글링해 보니 찰리 파커와 레스터 영을 비롯해서 버브 음반 표지 여러 장이 나온다. 음악가 사진이나 기타 도안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디자인이다 보니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달까.


그러고 보니 벌써 10여 년도 더 전의 일인데, 씨디 박스세트 붐이 일면서 재즈 분야에서도 블루노트를 시작으로 주요 음반사의 대표작을 20-30장씩 묶은 저렴한 박스세트가 여러 종 출시된 적이 있었다. 국내 제작의 한계로 슬리브 규격도 제멋대로이고 표지 그림의 화질도 떨어져서 영 조악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요 명반을 모았다는 점은 매력이었다.


그중 '재즈 트레인'이라는 시리즈명으로 나온 박스 세트중에 버브 음반을 30종 모아 놓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찰리 파커와 레스터 영을 비롯해서 데이비드 스톤 마틴이 표지화를 맡은 음반도 여러 장 수록된 모양이다. 여전히 대중적이지는 않은 재즈 분야에서도 특히나 이례적인 음반 표지 디자이너의 이야기라니, 이래저래 특이한 책인 듯하다.


최근 가을이 되니 캐논볼 애덜리의 시꺼먼 앨범이 문득 생각나서 오랜만에 블루노트 박스 세트를 꺼내 완주하고, 지금은 또 다른 박스로 건너간 상태인데, 한동안 먼지 쌓여 있던 음반들을 꺼내 뒤적여 보니,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어도 그때 사놓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음반 가격도 대폭 오른 다음이니.


역시나 몇 년 전에 유명 재즈 음악가들의 음반을 다섯 장씩 엮어서 염가로 판매하던 세트도 있었는데, 앞서 말한 수십 장씩의 박스세트에는 들어 있지 않은 음반도 있어서 제법 모으는 재미가 있었다. 음반 표지 재현의 측면에서는 거의 처참할 정도의 화질과 지질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다시 구하기도 힘드니 어쨌거나 그때 무리해서 짬짬이 구해 놓기 잘했다 싶다.


음반을 많이 가진 선배 한 사람은 나귀님의 이런 싸구려 취향을 싫어해서, 이번에 무슨 박스가 나왔다고 알려주면 왜 그런 걸 사느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때로는 어떤 음반이 괜찮더라고 칭찬하면, '그래, A도 좋지만 B도 역시나 좋은데, 아마 그건 싸구려 박스세트 따위에는 들어 있지 않을 거야' 하고 말을 얹었다가, 그것도 들어 있다고 말해주면 짜증내곤 했다.


나름 고급 수집가의 입장이다 보니 초보 수집가의 행보가 우스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긴 음반보다 책을 많이 수집한 나귀님의 입장에서도, 을유문화사 80주년을 맞이해 <큰사전> 전6권부터 최민순 <신곡>과 <지봉유설> 같은 유명 절판본을 재현한 30권짜리 미니북 박스세트가 나왔다 치면, 이미 다 가진 수집가 입장에서야 반갑기보다는 오히려 서운했을 테니까.


비록 저렴한 박스세트의 울타리 안에서 맴도는 나귀님이지만, 그래도 반복 청취하다 보니 의외로 새로운 호기심의 단서를 찾아내곤 한다. 예를 들어 이번에 블루노트 박스세트에 들어 있던 소니 롤린스의 빌리지 뱅가드 실황 음반에서 베이시스트의 즉흥 연주 가운데 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는데, 나중에 다른 박스세트의 셀로니어스 몽크 음반에도 똑같이 나왔다.


구글링해 보니 롤린스 음반에 참여했던 윌버 웨어(1923-1979)라는 베이시스트가 몽크의 콜트레인 합작 음반에도 참여했었다고 나오니, 아마도 그 사람의 연주가 아니었나 싶다. 이 사람이 참여한 다른 음반은 또 뭐가 있나 구글링했더니, 역시나 지금까지 모은 박스 세트에 들어 있는 몇 가지가 눈에 띄니, 다음번에는 베이스 연주에 유의해서 들어보아야 되겠다.


게다가 요즘은 유튜브라는 희한한 물건이 있어서, 충분한 시간과 호기심만 있다면 이전에 몰랐던 많은 것을 배워가는 각별한 재미가 있다. 이른바 '김나박이' 가운데 하나인 (하지만 '장카설유'까진 아닌) 나얼이라는 가수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직접 엘피를 골라 틀어주는 시리즈가 있는데, 나귀님으로선 영 생소한 곡들이 대부분이라 오히려 재미있었다.


최근에는 한때 유행한 지브리풍 사진 만들기처럼 AI를 활용해서 '비슷한 느낌으로' 만든 사이비 음악도 유튜브에 많이 올라온다. 어쩌면 이런 가짜 음반과 가짜 음악가의 범람 때문에라도, 아예 엘피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과 음반 표지까지 그대로 보여주는 아날로그 콘텐츠가 더 유행하는 것은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도 어쩌면 그 연장일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전설적인 삽화가 아서 래컴, 노먼 록웰, 조지프 크리스천 레이엔데커의 도록을 비롯해서 최근에는 상업 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들에 관한 책도 여럿 번역된 모양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은 또한 그쪽의 연장이기도 한 듯하다. 아니면 <레코스케>라는 기묘한 만화와 마찬가지로 살짝 맛이 가 있는 수집광만을 열광시킬 극도의 마니아적인 책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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