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난리가 난 캄보디아 한국인 납치 감금 사건 보도를 접하다 보니, 그 배후의 중국 범죄 조직이 운영하는 범죄 단지와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지명 중에 '시아누크빌'이라는 것이 있기에 흥미가 동했다. 십중팔구 '시아누크'의 이름을 따서 만든 지명인 듯한데, 그러고 보니 그 이름을 뉴스에서 들은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싶어서 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노르돔 시아누크(1922-2012)는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시절 어린 나이로 허울뿐인 왕위에 올랐다가, 이후 독립, 전쟁, 축출, 연금, 복귀라는 파란만장한 체험을 했던 인물이다. 허수아비 국왕, 줄타기 외교의 달인, 제3세계 독자 노선의 대표 인물, 우방국을 떠도는 망명객, 속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 같은 다양한 평가를 받은 것도 그래서다.
특히 망명 시절에는 각별히 친했던 김일성의 배려로 한동안 북한에서 머물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중국과 북한을 오락가락하던 '시아누크 공'의 동향에 각별히 주목해서 뉴스에서도 언급했던 모양이다. 군주제를 반대하는 북한이었지만, 왕따 시절 자국을 국제 무대에서 최초로 인정했던 캄보디아 전직 국왕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는 평가이다.
물론 '교황은 몇 개 사단을 갖고 있느냐?'는 스탈린의 일침을 적용하자면, 국력 면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전세계의 말석에 머물 수밖에 없는 캄보디아였지만, 시아누크 특유의 친화력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린 덕에 한때마나 여러 강대국의 주목을 받았으니 흥미로운 일이다. 다만 그 지인 대부분이 불운한 최후를 맞이한 독재자였다는 점은 한계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른바 '킬링 필드'라는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 때문에 살짝 가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사실 시아누크 치하라고 해서 태평천하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시아누크의 정치적 오판과 줄타기 외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실정으로 고질적인 사회 불안이 발생했고, 이후 크메르 루주와 군부 독재가 뿌리를 내릴 토양을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 오늘날의 대체적 평가인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가 미국 언론인 버나드 크리셔의 도움으로 쓴 회고록이 번역되기도 했다. 출판사가 무려 '디자인하우스'인데, 그 당시에는 잡지 위주였고 단행본은 개척 단계이다 보니 이런 의외의 책도 낸 듯하다. 뒷날개를 보면 심지어 '화성인' 유리마의 책도 간행했던데, 한 시대를 풍미한 기인이었는데도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무니 꽤 허무한 일이다.
시아누크의 회고록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자서전까지는 아니고, 그가 외교 무대에서 활약하며 만났던 드골, 네루, 수카르노, 주은래, 나세르, 모택동, 티토, 차우셰스쿠, 흐루시초프 같은 각국 정상들에 대한 추억을 풀어놓은 일화집이다.(다만 '절친' 김일성에 대한 회고까지는 없던데, 원래부터 없었는지 아니면 번역 과정에서 빠졌는지는 나귀님도 잘 모르겠다).
공저자의 서문에도 나온 것처럼 캄보디아의 역사와 현실을 회고하는 본격적인 자서전이 아니라는 점은 아쉽지만, 비록 자기미화 성향의 짧은 관찰기에 불과하더라도 한 시대를 풍미한 다양한 인물에 대한 일화와 평가를 색다른 각도에서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흥미로운 자료이다.(다만 번역과 교정 모두 그리 좋지 않아서 종종 황당한 오타가 눈에 띈다!)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에 비하면 '다시 보니 선녀 같다'던 시아누크였지만, 이후에도 군부 독재가 지속되면서 캄보디아의 상황은 그리 좋아지지는 않은 모양이고, 이번에 한국인 납치 감금 사태라는 역대급 사건이 터지면서 새삼스레 국제적인 악명을 더 쌓아 올리는 모양이다. 지나친 과장이란 교민들의 항변도 있지만, 어쨌거나 안전한 나라까지는 아닌 듯하다.
배후 세력인 중국이 문제라는 지적도 맞기는 하지만, 애초에 독재 정권 치하이다 보니 그런 무법천하도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자정 노력이 없는 한 저런 상황이 지속될 터이니, 당분간은 아예 발을 끊는 것이 방법일 듯하다. 일각의 지적처럼, 현재 캄보디아의 상황이야말로 마치 무슨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범죄 국가, 또는 기능부전 국가의 모습이다.
세계적으로 흥행하다 못해 심지어 일본에서는 포르노 패러디까지 나왔다는 (심지어 원작 출연 배우가 바로 그 포르노를 언급했다가 뭇매를 맞았던)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설득력 없는 부분이 바로 현대 한국을 그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점이었다. 총기 소지가 금지되고 곳곳에 보안 카메라가 설치된 나라에서 과연 그런 행사 개최가 가능할까.
따라서 차라리 재난이나 전쟁 같은 파국 직후에 사회 질서가 교란되고 약육강식이 일반화된 근미래의 한국이라든지, 아니면 가상의 독재 국가라면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금의 캄보디아야말로 그런 창작물에는 가장 어울리는 배경이 아닐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사태를 보며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로 나오겠다'며 혀를 찬 사람도 없지 않았다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