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지 코진스키의 중편 "정원사 챈스의 외출"의 주인공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려서부터 중년이 될 때까지 사실상의 감금 상태에서 살아온 것으로 묘사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느 부잣집에서 식객으로 살면서, 낮에는 정원사 노릇을 하고 밤에는 TV 시청을 낙으로 삼다가, 어느 날 집주인이 사망하며 실직자가 되어서야 난생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발을 내딛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19세기 초 독일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된 소년 카스파르 하우저와도 유사한 상황이다. 정확한 나이까지는 몰라도 10대임에는 분명했는데, 말도 몇 마디 못하고 세상살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는 점에서 혹시나 어려서부터 어딘가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고, 워낙 이례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코진스키의 소설 속 주인공도 여차 하면 현대의 카스파르 하우저가 될 뻔했지만, 운 좋게도 그는 거리를 배회하다가 우연히 미국 정계의 유력자를 만나게 되고, 이후 대화 중에 자기가 유일하게 아는 내용인 식물과 원예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음으로써 상대방에게 의외의 영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때부터 그의 '멘토'로 간주되어 미국 정계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주인공이 주위 사람으로부터 감탄과 존경을 얻어내는 과정은 전형적인 '착각물'의 전개 방식과 다르지 않다. 최근의 어떤 정치경제적 사안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제때 맞춰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지를 치고 어쩌고 하면서 식물의 재배에 대해 줄줄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상대방은 이 답변이 해당 사안을 원예에 빗댄 비유라고 착각하고 감탄해 마지않는 것이다.
급기야 대통령까지도 주인공을 만나서 들은 '원예론'을 연설에서 인용하는 상황이 되자, 미국 정부에서는 물론이고 냉전 시대 경쟁국인 소련 정부에서도 저 수수께끼의 '멘토'에 대한 뒷조사에 착수하지만, 아무리 알아보아도 그 출신이나 이력에 대해서는 나오는 것이 없어 당황한다. 이런 와중에도 주인공은 여전히 타인의 착각 덕에 출세가도를 질주하게 된다.
오래 전에 읽은 작품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낸 까닭은, 최근 대통령 보좌관 가운데 하나인 여성 직원의 정체를 두고 논란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최측근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이렇다 할 경력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신상까지도 공개된 적 없다 보니, 새로운 문고리 권력이 아니냐는 추측에서부터 심지어 북한이나 중국 출신 간첩이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신인 연예인이 잘 나간다 싶으면 곧바로 학폭이나 비행 증언이 나오곤 했던 과거 사례를 감안하면 확실히 이례적이어서, 잘만 하면 외계인이나 인조 인간이나 파란 해골 13호가 아니냐는 추측마저 나올 법한데, 국회 소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제 발이 저린 듯 청문회 출석 의무가 없는 보직으로 재빨리 옮겨간 것을 보면, 뭐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문고리 권력'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박근혜 정부 당시 최순실 논란이 벌어졌을 때라고 기억하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여전히 특검이 진행 중인 윤석열 정부에서는 물론이고 더 이전의 역대 정권마다 거기에 해당하는 비선실세는 항상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하나같이 그 말로가 좋지는 않았으니, 이번에 논란이 된 인물은 또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나귀님이 보기에는 이번 논란 제기 직후에 나온 제보 가운데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한 야당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해당 인물이 신구대 '환경조경학과'를 졸업했고, 그 인연으로 자기 은사를 '산림청장'에 임명하는 데에 관여했다기 때문이다. 곧바로 오보로 밝혀져 도로 묻히기는 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면 코진스키 소설의 현실판이 나올 뻔했다!
왜냐하면 신구대는 한때 명성을 떨친 신구출판사의 창업주 이종익이 자신의 농장 부지에 설립한 학교이다 보니, 조경학과와 인쇄학과 등 본인의 관심사를 반영한 분야를 중점적으로 육성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차 하면 한국의 '정원사 챈스'가 나올 뻔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코진스키와 신구문화사 모두 좋아하는 나귀님으로서는 아까울 수밖에...
[*] 나귀님이 알기로, 위에 언급한 코진스키 중편의 최초 번역본은 책세상에 나온 미국 현대 작가 4인 (로버트 쿠버, 하비 스와도스, 카슨 매컬러스, 저지 코진스키) 작품집인 <하녀 볼기치기>에 수록된 "챈스 박사"였고, 이후 웅진출판 "포스트모더니즘 걸작 선집" 중 하나인 코진스키의 <편력>에도 "정원사 챈스의 외출"로 함께 수록된 바 있으며, 저작권 계약이 불필요하던 시대이다 보니, 그 외에 다른 번역본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한동안 이 모두가 싹 절판되면서 한때나마 희귀본 대접을 받기도 했는데, 2010년쯤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근간 예고만 하고 소식이 없더니, 엉뚱하게도 2018년에 미래인이라는 출판사에서 툭 하니 나왔는데, 이미 숱한 절판본이 따라갔던 경로와 유사하게 '절판일 때에는 수요가 높다가, 재간행되니 수요가 사라지는' 신기한 현상이 반복되는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민음사의 근간 예고에 올라온 제목이 원제를 직역한 듯한 <거기 있으므로>이고, 나머지 번역서는 하나같이 "챈스"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살려 제목을 붙였다는 점이다. <하녀 볼기치기>에 붙은 편역자 안정효의 의견에 따르면 원제인 Being There는 "박통"(博通), 즉 척척박사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라던데, 사실 여부는 나귀님도 모르겠다. 코진스키의 중편은 1979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주연을 맡은 피터 셀러스의 '어른의 모습을 한 어린이' 연기와 몇 가지 세부 묘사는 격찬을 받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이 마치 초월적 존재라도 된 것처럼 나온 묘사는 사족에 불과했다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러고 보니 나귀님도 영화에 나온 셀러스의 사진을 표지에 사용한 페이퍼백을 하나 갖고 있는데, 어디 뒀는지는 영 모르겠다. 다만 이 작품에 대해서는 뒤늦게 표절 의혹도 제기된 바 있는데, 폴란드 출신 미국인인 저자가 국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폴란드 작가의 소설을 표절했다는 주장이었다. <페인트칠 당한 새>를 비롯한 다른 저서에 대해서도 표절이나 대작 혐의가 없지 않은 것을 보면 (무명 시절의 폴 오스터도 그의 작품 '윤문'에 참여했던 경험을 훗날 밝힌 바 있다) 이래저래 논란이 되는 인물이기는 한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싹 절판이어서 더 이상 논란은커녕 화제조차도 되지 않는 듯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