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며칠 전 바깥양반이 저녁에 들어오자마자 오늘 라디오에서 들었다며 '오데옹 셰링'이라는 작곡가가 타계했더라고 한다. 생소한 이름이라서 그게 누군가 싶어 구글링해 보니 최근 타계한 러시아의 작곡가 '로디옹 셰드린'(Rodion Shchedrin)에 관한 기사가 뜨기에, 십중팔구 이 사람의 이름을 얼핏 들어 착각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물어보니까 그런가보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비교적 생소한 현대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에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있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예전에 한 번 그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보았던 기억이 났다. 한때 알라딘에서도 장당 500원이 안 되는 초염가에 판매해서 화제가 된 '베스트 러시아 클래식 골드 100선'이라는 음반 박스 세트에 이 작곡가의 곡 정보가 잘못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예당음반인가 하는 회사에서 제작한 이 박스 세트는 구 소련 시절의 클래식 음원을 모아서 만든 선집으로, 원래는 '러시아의 위대한 연주가들의 연주: 러시아 클래식 100선'이라는 이름으로 제법 거창해 보이는 원목 상자에 담아서 판매했다고 알고 있는데, 10년쯤 지나자 볼품없는 종이 상자 두 개에 나눠 담아서 헐값에 판매하는 물건으로 재발매되고 말았다.


나귀님도 궁금한 마음에 알라딘에서 하나 구입해 보았는데, 알고 보니 이미 갖고 있던 브릴리언트 클래식의 시디 100장짜리 '러시안 아르히브 시리즈 전집'과 중복된 음원도 여럿이고, 다른 무엇보다도 음질 자체가 엉망이라서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생소한 작곡가나 연주자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하루 한 장씩 꾸역꾸역 듣고 넘겼다.


그런데 그중 한 장인 관현악곡 선집에서 뭔가 많이 들어 본 곡조가 흘러나오기에, 이게 뭔가 궁금해서 뒤표지를 확인해 보니 '로디옹 셰드린'이라는 생소한 작곡가의 작품이었다. 이렇게 유명한 음악을 만든 사람을 내가 왜 모르고 있었나 싶어 자책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들은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 무곡"이고, 뒤표지의 곡 순서가 잘못 나왔을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귀에 익은 작품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유튜브에서 찾아낸 그의 대표곡을 이것저것 들어 보았지만, 나귀님이 아는 곡은 하나도 없었고, 미안하지만 마음에 드는 곡도 딱히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놀랍고도 반가웠으니, 그건 바로 이 낯선 작곡가가 19세기 러시아의 소설가 니콜라이 레스코프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는 점이었다.


레스코프라면 "왼손잡이"와 "괴물 셀리반", 그리고 수년 전에 영화화된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같은 인상적인 단편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월터 벤저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꾼"이라는 비평문의 주제가 바로 이 작가였음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셰드린은 레스코프의 "왼손잡이"와 "매료된 여행자"와 "봉인된 천사"를 오페라와 성악곡으로 각색했다.


그 외에도 고골의 <죽은 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체홉의 <갈매기>와 "개를 데리고 있는 여자"도 오페라와 발레 음악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면 원래 문학을 좋아하는 작곡가이겠거니 싶기도 하고, 심지어 나보코프의 <롤리타>조차도 오페라로 만들었다는 대목에서는 뭔가 살짝 수상쩍게 여길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하간 창작이 왕성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바깥양반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청와대... 말고 셰드린의 주요 작품을 들어보자고 하더니만, 유튜브로 대표작 몇 개를 듣더니 딱히 귀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 실망한 눈치였다. 그러다 유튜브가 추천한 관련 동영상 중에 1964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왼손잡이"를 보게 되었는데, 종이를 오려 만든 방식이다 보니 지금의 연출과는 달라서 오히려 신기했던 모양이다.


원제인 "툴라 출신의 사팔뜨기 왼손잡이와 강철 벼룩"에서 대강 짐작할 수 있듯이, 러시아 황제가 영국의 탁월한 기술력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수입한 미니어처 벼룩의 작은 발에 러시아 기술자들이 더 작은 편자를 박아 넣어서 자국의 더 뛰어난 기술력을 입증했다는 내용인데, 여기까지만 보면 해피엔딩이지만 이후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씁쓸한 면이 없지 않다.


자국 황제로부터 치하를 받고 영국 산업 시찰에 나선 기술자 '왼손잡이'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를 파악하게 되어 상부에 알리려 하지만, 술에 취한 상태에서 행려병자 취급을 받다가 몸이 망가져서 결국 쓸쓸히 사망한다. 그가 취득한 중요한 정보도 유실되어 러시아는 훗날 전쟁에서 대패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 전형적인 '민중 영웅' 전설이다.


뛰어난 인재를 알아본 영국에서 영입 제안을 받고도 조국에 봉사하겠다며 거절한 '왼손잡이'였지만, 정작 귀국해서는 자국에 만연한 부조리로 인해 치하 대신 피해만 당하고 쓸쓸히 눈을 감았다는 것이야말로, 제정 러시아의 현실을 꼬집은 풍자적인 결말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가장 큰 아이러니는 유사한 상황이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비일비재하더라는 것이겠지만.


어쩐지 지난 정부의 최대 실책 중 하나로 거론되는 과학기술 분야 예산 난도질 사건이 떠오르기도 한다. 즉흥적인 결정으로 멀쩡한 청와대를 놔두고 굳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이전해서 막대한 예산을 허비하는 한편, 오랜 시간과 많은 자금이 필요한 장기 정책은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말았으니, 이것 역시 처벌까지는 몰라도 지탄만큼은 충분히 받을 만한 악행이었다.


다만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을 비교해서 화제가 된 어느 다큐멘터리에서처럼 일시적인 열풍을 마치 올바른 길인 양 호도해서는 곤란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수년 전 코딩 열풍이 불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그래밍 교과 과정을 넣는다 어쩐다 하더니, 막상 인공지능 시대가 개막되자 의외로 프로그래머 일자리는 더 줄어든다고 보도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부나 기업에서 대대적으로 육성하는 연구는 자칫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유행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니, 차라리 기초적이고 장기적인 차원의 연구 지원이 오히려 중요하지 않을까. 생물학자 리처드 포티의 말마따나, 어쩌면 아프리카 호수에 사는 하찮은 민물고기에 대한 시시콜콜해 보이는 연구에서 의외로 인류에게 유용한 것이 나올 수도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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