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업다이크의 "토끼" 4부작 이야기를 하려고 보니, 아무래도 예전에 사다 놓았던 책들을 줄줄이 다시 한 번 꺼내 봐야 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책장을 뒤졌다. 그러다 보니 원래 찾으려던 책은 못 찾고, 오히려 있는 줄도 몰랐던 책을 찾아내기만 했다.(업다이크의 "메이플 부부 연작 단편집"인 <벌거숭이들>이 원래 목표였는데, 결국 찾기는 찾았다, 엉뚱한 곳에서!)
특히 놀랐던 것은 예전에 사다 놓았던 <제5도살장>과 <제일버드>의 이본이었다. 전자는 김종운 교수의 을유문화사 번역본이 최초였다고 알고 있는데, 나귀님이 관심을 갖게 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절판되어 아쉽던 차에 청량리 어느 헌책방에서인가 (예전에는 낯선 동네를 버스 타고 지나가다 헌책방이 보이면 얼른 내려 들어가 보곤 했다!) 다른 번역본을 구입했다.
<빌리 필그림과 함께 여행을 떠납시다>(커어트 보네거트 지음, 정환호 옮김, 오른사, 1980)라는 책인데, 이후 재간행된 김종운 번역본을 구입하면서 버린 줄로 알았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아직까지 버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던 셈이다. 반면 <제일버드>(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일충 옮김, 세광공사, 1980)는 이게 최초이고, 웅진 포스트모던 선집 번역본이 나중이다.
<제5도살장>은 처음 읽었을 때에만 해도 시간여행이라는 SF적 요소에만 집중했었는데, 이후 저자의 발언을 감안해 보면 드레스덴 폭격이라는 참사에 대한 여론 환기를 의도한 면이 더 컸던 모양이다. 저자는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독일의 피해에 대해 연합국이 침묵하는 것이 괘씸한 모양이지만, 여차 하면 전범국에 면죄부를 줄 여지도 있으니 쉽지 않은 문제다.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한 사례로 바꿔 말해 보자면, 과연 일본이 핵폭탄에 두 번이나 얻어맞았다는 사실 때문에 무작정 피해자 행세를 할 수 있느냐는 의문과도 비슷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인명 피해야 물론 안타깝지만, 그런 비극을 초래한 근본 원인은 미국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에게 있으며, 또한 일본에게 피해를 입은 주변국의 입장에서야 쌤통이니까.
또 하나 의아한 부분은 <제5도살장>이 미국에서는 청소년 유해 도서로 종종 지정되는 악명 높은 책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그간 별다른 논란 없이 판매되어 왔다는 점이다. 언젠가 김훈의 소설이 일부 내용 때문에 외설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재간행된 보네거트의 소설에 대해서는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 것을 보며 아이러니한 느낌이 있었다.
<제일버드>는 SF의 요소가 빠진 세태 풍자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닉슨 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다시 들춰보니 실제 사건과 인물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나귀님도 처음 읽었을 때에는 미처 몰랐던 잔재미가 더 있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독서에도 다 때가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이번에 업다이크 책을 뒤지다가 발견한 '있는 줄도 몰랐는데 있었던 책들' 중에서도 가장 희한했던 것은 바로 <대서양횡단실기>(찰스 린드버그 지음, 박상용 옮김, 수도문화사, 단기 4288[1955])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예전에 헌책방 고구마에 갔다가 사장님이 창고를 새로 얻었다기에 구경하러 갔다가 우연히 보고 깜짝 놀라 잽싸게 구입했던 책이다.
제목 그대로 린드버그의 대서양 단독 횡단 비행 체험기인데, 원제인 "스피리트 오브 세인트루이스"는 당시에 그가 몰았던 비행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살짝 의외이긴 하지만, 츠루타 겐지의 만화 <스피리트 오브 원더>의 제목이 린드버그의 이 비행기/책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후일담도 있다. 여하간 별 걸 다 갖고 있었구나 싶어 스스로가 기특하고도 한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