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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헤밍웨이의 사후에 간행된 무명 시절의 파리 체류기 <가변 축일>을 보면, 하루는 선배 작가 포드 매독스 포드와 함께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수상해 보이는 대머리 남자가 지나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일화가 소개된다. 포드는 저 남자가 힐레어 벨록(1870-1953, 영국의 작가 겸 정치인)인데, 방금 눈이 마주쳤지만 내가 일부러 모르는 척한 거라고 '쎈척'을 한다.


그런데 그날 늦게 다른 친구와 어울리던 헤밍웨이 앞에 또다시 대머리 남자가 지나가게 된다. 아까 들은 정보를 토대로 헤밍웨이가 '저 남자가 힐레어 벨록이라던데' 하고 말하자, 함께 있던 친구가 어이없어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무슨 소리야, 저건 악마숭배자 알레이스터 크롤리(1875-1947, 영국의 오컬트 연구자)잖아. 자칭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인간 말이야.'


크롤리를 벨록으로 오인한 포드의 발언은 물론이고, 이를 답습한 헤밍웨이의 발언도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에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헤밍웨이로선 이 일화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인지, 당시 집필 중이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원고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똑같이 재현했다고 전한다.(물론 완성본에서는 삭제되었다고 전하지만).


20세기 초에 활동한 오컬트 연구자 알레이스터 크롤리는 여러 가지 기행을 벌였고, 급기야 앞서 소개한 일화에서 헤밍웨이의 지인이 언급한 것처럼 다채로운 악명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오늘날은 신지학이며 오컬트며 하는 영성 연구 자체를 허무맹랑하다고 간주하는 것이 대세이지만, 크롤리를 대마법사로 추앙하는 소수의 추종자도 여전히 있는 모양이다.


지금은 오히려 일종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사례가 헤비메탈 가수 오지 오스본의 노래 "미스터 크롤리"이다.(노래에서는 "크라울리"라고 발음한다). 사실은 나귀님도 이 노래를 통해 그 이름을 처음 접한 셈이었는데, 당시에는 헤비메탈 가수마다 악마, 마법, 해골 같은 음산한 상징을 앞다투어 차용하던 시절이니 그럴 만도 했었다.


오지 오스본이 한때 몸담은 밴드 블랙사바스도 그 이름이며 외관에서 풍기는 불길한 이미지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한 사례라고 하던데, 솔로 시절의 오스본은 한 술 더 떠서 다양한 충격적 기행을 시도하며 악명을 쌓아 올렸다고 전한다. 급기야 미국의 보수 기독교계며 학부모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반발하면서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에 성공했으니 재미있는 일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악마주의'라기보다는 '상업주의'의 산물에 불과했지만, 나귀님도 교회 다니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행동이 곱게 보일 리 없어 한동안 외면했었다. 한 번은 동네 작은 '음악사'에 <스피크 오브 더 데블> 음반이 전시된 것을 보고 기겁한 적도 있는데, 지금 다시 봐도 징그러워선지 최근 발매반에서는 원래의 표지 이미지를 축소해 집어넣은 듯하다.


이쯤 되면 "미스터 크롤리"도 저 오컬트 연구자를 추앙하는 내용인가 싶지만 (심지어 저 노래와 동명인 국내 유일의 크롤리 전기도 이 노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로는 당신 과대망상 아니냐며 조롱이며 비아냥을 날리는 내용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귀님처럼 오지 오스본의 노래를 통해 크롤리를 알게 되는 사례가 여전히 많다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이렇게 악명 높던 오지 오스본도 나이가 들면서 '어둠의 군주'(악마)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되고, 급기야 식구들을 출연시킨 <오스본 가족>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까지 나오며 '쎈척하는 할배'로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개인적으로는 그의 명곡 "크레이지 트레인"을 스윙재즈 스타일로 편곡해서 무려 팻 분(!)이 부른 그 주제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오지 오스본이 어제 76세로 사망해서 뉴스에까지 나왔다. 마침 월초에 있었던 고별 공연 영상에서는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이 살짝 측은하기도 했었다.(몇 년 전에 조니 미첼도 비슷한 모습으로 골골대며 공연하는 모습이 나오기에, 한동안 싫어했던 마음이 싹 녹아버렸던 적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지난번 프린스의 타계 직후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추모 열기가 뜨거운 것에 놀란 까닭은 그가 생존 시에 종종 논란을 몰고 다녔다고 기억했기 때문이다. 오지 오스본의 타계 직후 반응도 비슷한 느낌인데, 비록 기행을 벌이기는 했어도 결국 노래가 좋았으니 긍정적으로 기억되는 셈이려나.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크롤리도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만...




[*]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 회고록은 1970년대 휘문출판사의 <헤밍웨이 전집>에 수록된 것으로 처음 접했는데, 지금은 2000년대 들어 새로 나온 번역본만 해도 서너 가지가 된다. 위에서 언급한 힐레어 벨록의 저서 번역본도 두 가지나 되고, 심지어 알레이스터 크롤리의 저서 번역본도 있다! 사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중에도 여전히 추종자가 있는 것을 보면, 크롤리의 인기도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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