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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지난번에 벚꽃 구경하러 신촌 나갔다가 잠깐 들른 지하 헌책방에서 살까말까 고민하다 결국 놓고 나온 책이 하나 있었다. 제목이 <시베리아 탐험기>인데, 예전에 제목 비슷한 책을 하나 산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같은 출판사에서 저자만 다른 <시베리아 탐험 일지>라는 책도 내놓았기 때문인데, 이미 가진 게 뭔지 몰랐으니 아깝지만 안 사고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책장을 뒤져 보니, 내가 이전에 구입한 책은 <탐험 일지>였다! 이번에 <탐험기>까지 샀다면 딱이었는데, 헛갈려서 망설이는 바람에 결국 놓친 셈이다. 좋은 기회를 날렸다고 투덜거렸더니, 바깥양반이 사실은 자기도 아까 살까말까 고민하다 놓고 나온 책이 한 질(?) 있으니, 내일 오전에 전화를 걸어 예약해 놓고 오후에 가서 사오겠다 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시베리아 모험기 2종을 모두 구입하게 되었다. <시베리아 탐험기>의 저자 조지 케넌(1845-1924)은 미국의 전신기사로 1864년부터 2년간 러시아 횡단 전신 부설을 위해 시베리아를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저술했다. 이후 20년간 러시아 각지를 여행했고, 시베리아 유형 제도를 비판했으며, 이후 미국 정부의 러시아 전문가로 활동했다.


역자 해설에 따르면 케넌은 러일전쟁 당시 언론인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했지만 부정적인 내용의 보도를 일삼았고, 이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성사시킨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외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선의 특사 헐버트를 냉대하는 등 한국과는 악연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베리아 여행기만큼은 <데르수 우잘라>에 버금가는 걸작 논픽션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번역자 정재겸이 시베리아에 각별히 관심을 두고 관련서를 여러 권 번역했다는 것이다. 우리역사연구재단에서 나온 <시베리아 탐험기>와 <시베리아 탐험 일지> 외에, 솔에서 나온 <시베리아 원주민의 역사>도 번역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역사연구재단'은 '동북아역사재단'과 종종 헛갈리는데, 양쪽은 별개의 단체이고 후자만 공공기관이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의욕이 앞서더라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민폐만 끼치게 마련인데, 나귀님이 보기에는 <시베리아 탐험기>도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만 같다. 당장 서두에 실린 래리 맥머트리의 소개글만 봐도 터무니없는 오역이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인데, 이런 식이라면 이 책의 본문은 물론이고 다른 시베리아 관련서까지도 오역 의혹이 짙어진다.


맨 먼저 눈에 띈 오역은 미국 작가들이 쓴 대표적인 여행기를 언급하던 차에 마크 트웨인의 <유랑기(Roughing It)>와 <미시시피 강의 생활(Life on the Mississippi)>을 한 작품으로 오해해 <미시시피 강에서의 원시 생활 체험기(Roughing It, Life on the Mississippi)>라고 옮긴 부분이었다. 뭐, 간혹 있는 일이니까 그냥 넘어갔는데, 다음의 오역은 더 심각했다!


"이들은 오래된 신문들을 읽다가 애틀랜틱 케이블 사가 승리를 거두고 러-미 전신회사는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2쪽) 하지만 이 문장은 오역이고, 제대로 옮기면 대략 '대서양 횡단 전신 부설이 성공하며 러-미 전신 부설은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이 대목은 역자 해설에서도 언급된 케넌의 시베리아 탐험기의 동기와 관련 있다.


당시 웨스턴유니온 전신 회사에서는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대서양 횡단 전신 부설을 추진했지만,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하자 반대 방향으로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즉 러시아 횡단 전신을 부설해서 유럽과 미국을 연결한다는 발상이었고, 이에 전신기사 조지 케넌은 선발대를 꾸려 2년 동안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 시베리아를 헤매며 사전 답사를 다녀왔던 것이다.


하지만 기껏 고생하고 돌아와 보니, 그 사이에 웨스턴유니온은 대서양 횡단 전신 부설에 결국 성공해 버렸고, 그래서 러시아 횡단 전신 부설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역자는 '대서양 횡단 전신'과 '러-미 전신(러시아 횡단 전신)' 모두를 기업명으로 착각해서 "애틀랜틱 케이블사"와 "러-미 전신회사"로 오역했는데, 그로 인해 문맥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이런 식으로 문맥을 놓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보니, 심지어 멜빌부터 트웨인에 이르는 동시대 미국 작가들의 주요 여행기와 그 특징을 간략히 설명한 다음, "간단히 말해서, 위에서 설명한 맥락에서 조지 케넌의 책을 읽어야 한다"라고 덧붙인 저자의 당부를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조지 케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31쪽)라고 오역을 넘어 창작까지 해놓았다!


심지어 소개글을 쓴 래리 맥머트리에 대해서도 "<브로크백 마운틴>의 작가"라고 잘못 소개했는데, 비록 그 작품으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기는 했지만 맥머트리의 역할은 애니 프루의 단편을 시나리오로 각색한 것뿐이었다. 사실 그는 시나리오 작가이기 이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소설가이기도 하고, 그의 작품을 각색해서 제작된 영화만 해도 이미 여러 편이다.


그중 대표적인 영화가 <애정의 조건>(1983)인데,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까지 5개 부문을 휩쓴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도 훌륭해서 잔잔한 피아노곡인 메인 테마는 광고에 종종 사용된다. 감독 제임스 L. 브룩스는 <브로드캐스트 뉴스>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로도 유명하고, 무엇보다도 <심슨 가족>의 제작자로 가장 유명하다.


맥머트리 원작 영화 중에 또 하나 유명한 것이 <라스트 픽쳐쇼>(1971)인데, 모델 출신이었던 시빌 셰퍼드가 당시 남친이었던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빽으로 이 작품에서 조연을 맡아서 확 떴고, 후속 작품에서 연이어 발연기를 선보이며 내리막길을 걷다가 <택시 드라이버>에서 다시 조연으로 부활하고, <블루문 특급>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후일담이 유명하다.


영화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래리 맥머트리의 작품 중에 우리나라에 (아마도) 유일하게 번역된 작품이 바로 이 두 가지이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애정의 조건>은 영화의 국내 개봉에 맞춰 우후죽순으로 간행된 번역서가 서너 종쯤 되는 모양인데, 나귀님이 책장을 뒤지니 비교적 멀쩡했던 번역서 대신 <성(性)바라기>라는 괴이한 이본(異本)만 있다!


"해바라기가 해를 찾듯 오르가즘을 목말라하는 여자" 운운 하는 표지의 광고 문구만 놓고 보면 딱 1980년대 길거리에서 흔히 보던 카바이트 불빛 책 노점에서 <황홀한 사춘기> 등과 함께 판매될 법해 보이지만, 내용은 야한 것과 거리가 멀고 영화에서처럼 오로라와 에마의 모녀 갈등뿐이다. 물론 나귀님 기억에는 영화의 내용이 원작보다 훨씬 더 유머러스했지만.


다행히 그 당시에 유행한 '영화 소설'(원작 무시하고 한국 사람이 영화 내용을 소설로 재구성한 사이비 소설)까지는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원작에 어느 정도까지 충실한 번역인지는 아직 비교해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라스트 픽쳐쇼>는 <마지막 영화 상영>이라는 번역본을 갖고 있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내 영혼의 푸른 텍사스>라는 제목으로도 나왔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래리 맥머트리가 장서가 겸 고서매매업자로도 유명하다는 점이다. 1970년부터 30년 넘게 헌책방을 운영하며 한때 2개 매장에 40만 권 이상을 보유했고, 2012년에 "마지막 서적 판매" 행사를 통해 개인 장서를 대거 경매로 매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지 케넌의 탐험기 소개글을 쓴 까닭도 희귀본 애호가라는 평소의 취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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