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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막바지로 접어들며 협상이 진행 중이다. 당선되면 전쟁을 곧바로 끝내겠다던 호언장담처럼 양국 모두에 압박을 가한 미국 대통령이지만, 유독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냉랭하다 못해 야멸찬 태도로 일관했고, 급기야 정상 회담 중에 말다툼을 벌이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희한한 일이다.


비록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미국의 지원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자주 국방을 이루지 못한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본래 소련 시절에 핵무기를 다량 보유했지만, 국내 정세 불안으로 미국과 러시아와 협상 끝에 전량 폐기를 선택했는데, 결국 러시아의 침략에도 속수무책이 되었으니 씁쓸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우크라이나가 항상 선역만 맡은 것까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은 했지만 부정부패가 워낙 심해서 불안한 정세가 계속된 것이 한 예이다. 급기야 영국 언론인 올리버 벌로가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부정부패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국제적 규모의 돈세탁을 지칭한 '머니랜드'라는 신조어를 고안했을 정도였으니.


이후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지만 정세 불안이 그치지 않다가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수년간의 전쟁으로 큰 피해까지 입었으며, 종전 과정에서도 미국의 압박으로 국토 상실과 자원 조공 등 손해를 억울하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이른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으며 피도 눈물도 없다는 국제 관계의 냉정함과 잔혹함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흠좀무'한 점은 '하늘이 억까하는 나라'인 우크라이나의 이런 억울한 처지가 어제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요충지이자 곡창 지대라는 특성상 근대까지도 폴란드와 러시아 같은 주변국의 등쌀에 종종 탄압을 받았다기 때문이다. 이런 우크라이나의 비극적인 역사를 응축한 것이 타라스 셰브첸코의 <유랑시인>에 수록된 여러 편의 시들이다.


이 책은 한길사의 대표 시리즈인 그레이트북스 가운데 한 권으로 출간되었는데, 다른 책들이 대부분 역사나 철학 같은 인문학 분야의 고전인 것을 감안하고 보면 문학 작품, 특히 시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외였다. 일단 번역자부터가 역사학자인 것도 특이한데, 문학보다는 역사의 측면에서 우크라이나를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번역하게 되었다고 해제에서 설명한다.


셰브첸코는 본래 농노로 태어났지만 미술에 재능을 보인 까닭에 귀족 후원자들의 모금을 통해 해방되었으며, 이후 화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반정부 활동 혐의로 10년간 유배에 처해지기도 했다. <유랑시인>에 수록된 시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인데, 때로는 압제자 폴란드인과 그 주구로 (잘못) 간주된 유대인에 대한 노골적 비난도 나온다.


이 당시 우크라이나의 상징이 바로 코사크 기병인데, 고골의 <타라스 불바>에 묘사된 것처럼 난폭하고 다혈질이지만 자유와 조국을 사랑하는 저 남자들의 목소리는 셰브첸코의 여러 시에서도 우렁차게 반복된다. 물론 현실을 돌아보면 목소리가 크고 자존심을 내세우나, 역량은 부족하여 손해를 자초하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한계이자 비극인가 싶기도 하다만.


흥미로운 점은 시를 이해하기 위해 덧붙인 배경 설명이 꽤나 방대하다는 점이다. 서두의 해제에서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한 개관만 무려 40페이지에 달하는데, 구입 당시에 잠깐 훑어볼 때에는 '시 한 편 읽자고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어서 의아했다가, 러시아와의 전쟁 이후 다시 읽어보니 워낙 험난했던 역사인만큼 긴 설명도 필요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유랑시인>을 구입했을 때에만 해도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창작되었다는 폴란드 민족 서사시 <판 타데우시>와 나란히 놓고 읽어보면 어떨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양국은 과거사의 앙금 때문에 한국과 일본 못지않은 앙숙 관계라고 하기에, 뭔가 큰 실수를 할 뻔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살짝 뜨끔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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