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부터 발자크의 단편 몇 가지가 생각나던 참인데, 지난 주에 바깥양반과 대화를 나누다가 "무신론자의 미사"의 줄거리와 유사한 일화를 듣게 되어서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꺼내 읽기로 했다. 내친 김에 "그랑드 브러테슈"와 "불사의 묘약"도 꺼내 읽었는데, 아쉽게도 내가 가진 번역서는 워낙 옛날 것들이다 보니 하나같이 중역본이어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무신론자의 미사"는 이성을 중시하고 종교를 배척하기로 악명 높은 어느 저명한 의사가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제자가 우연히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알고 보니 가난했던 학생 시절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은인이 사망하자,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은인을 기리려 무신론자인 의사가 매년 네 번씩 성당에 미사를 의뢰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하느님도 천국도 믿지 않지만, 혹시나 그런 게 있다고 치면 자신의 은인처럼 선량한 사람이야말로 꼭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혹시나 하느님이 계시다면 자신의 은인을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미사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찾아왔던 백부장의 사례처럼 '기이한 믿음'의 사례처럼도 보인다.
"불사의 묘약"에도 미사가 등장하지만, 이쪽은 아예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흑미사에 가깝다고 봐야 하겠다. 스페인 귀족 청년 돈 후안이 (저자는 이 사람이 훗날 몰리에르와 모차르트의 창작을 통해 유명해진 바로 그 난봉꾼이라고 주장한다!) 노환으로 사망한 부친에게서 불사의 묘약을 물려받지만, 그걸 이용해 소생시켜 달라는 부친의 유언을 무시하고 매장한다.
세월이 흘러 돈 후안도 아들에게 불사의 묘약을 물려주고 사망하지만, 순진한 아들 덕분에 얼굴과 팔까지만 소생한 상황에서 기뻐 설레발을 치다가 얼마 남지 않은 묘약을 담은 유리병이 깨지자 좌절한다. 사람들은 일부나마 부활한 그를 성자 취급하며 미사를 드리지만, 정작 본인은 부활에 실패한 나머지 갖가지 쌍욕을 늘어놓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랑드 브러테슈"는 동명 저택의 폐허를 발견한 화자가 그곳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알아낸다는 내용이다. 본래 어느 귀족의 소유였는데, 하루는 남편이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의 모습이 뭔가 수상하더라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다른 남자가 안방에 있었던 흔적을 감지한 남편이 그 은신처로 짐작되는 벽장 문을 열려 하자, 아내가 완강히 반대한다.
벽장 문을 여는 순간 부부의 신뢰가 깨졌다고 간주해서 이혼하겠다는 아내의 고집에 잠시 망설이던 남편은 그렇다면 '벽장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십자가에 대고 맹세하라고 요구한다. 아내가 그렇게 맹세하자 남편은 곧바로 미장이를 불러 벽장 앞에 벽돌을 쌓아 막아 버리고, 이후 수십 일간 그 앞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물론 아내도 나름대로 꾀를 써서 미장이를 매수하려 들고,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직접 곡괭이를 휘둘러 벽돌을 깨부수려 하지만, 이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모조리 지켜본 하녀의 말에 따르면, 부서진 벽돌 구멍 사이로 벽장에서 웬 남자의 얼굴이 흘끗 보였고, 이후 수십 일이 지나면서 희미한 신음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이후 남편이 사망하자 아내도 저택에서 나왔으며, 향후 50년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공증까지 마친 상태로 사망한다. 지난번 뉴스에서 동거녀를 살해하여 베란다에 옮겨놓고 시멘트 덩어리로 만들어 암매장했다가 발각된 범죄자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는데, 그 내용 때문에 "검은 고양이"와 "아몬틸라도 술통"에 이어서 발자크의 단편까지 떠올렸던 모양이다.
발자크의 "인간 희극" 번역서 목록에 관해서는 예전에 한 번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이 수년간 새로 번역된 것도 있고 절판된 것도 있다 보니 매번 시중에서 구입 가능한 작품 총수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꾸준히 출간되는 것만큼이나 꾸준히 절판되는 발자크이니, 사실은 그 명성에 비해서 인기가 실제로 그리 높지는 않다고 봐야 할 것도 같다.
"그랑드 브러테슈"는 예전에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서머싯 몸 선정 세계 단편 100선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는데, 이번에는 더 나중에 황금가지에서 나온 <세계공포문학걸작선: 고전편>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다. 양쪽 모두 영어 중역이다. "불사의 묘약"은 <악마의 초상>이라는 프랑스 괴기 단편 선집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는데, 이쪽은 일어 중역이라 더 좋지 않다!
"무신론자의 미사"는 펀앤런북스의 펭귄클래식스 가운데 한 권으로 처음 접했는데, 이 책에는 표제작 외에 "신병(新兵)"과 "지갑"이라는 단편도 들어 있다. 펭귄클래식스의 우리말 번역본이라면 대부분 2000년대 들어서 웅진에서 간행한 검정색 표지의 시리즈를 떠올리게 마련일 터인데, 더 먼저인 1996년에도 펭귄클래식스라는 이름을 걸고 간행된 시리즈가 있었다.
이 시리즈의 대본은 영국 펭귄 북스가 1995년에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유명 작가의 대표 단편을 엮어 권당 60쪽 내외로 간행한 60권짜리 미니북 세트이다. 책등 색깔에 따라 고전 시리즈인 '블랙' 세트와 현대작 시리즈인 '오렌지' 세트가 있었고, 따라서 오렌지 시리즈는 영국판과 미국판의 구성이 달라서, 13종만 중복되고 47종은 서로 다른 작품이 수록되었다.
1996년에 총30권으로 마무리된 펀앤런북스의 번역서는 원서 블랙 세트(16종)와 오렌지 세트 영국판(14종)에서 반반씩 선별한 것처럼 보인다. 표지마다 원서 표지와 함께 한옥의 문살 사진이 곁들여졌는데, '관조'가 찍었다기에 그게 뭔가 했더니만 스님 이름이었다! 30년 넘게 승려 겸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작품집도 간행했었는데 지난 2006년에 타계했다고 전한다.
우리말 번역본은 100페이지 내외라 단편 중에서도 긴 것은 서너 편씩, 짧은 것은 예닐곱 편씩 수록했고, 장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경우도 있다. 그중에서도 각별히 눈길이 가는 것은 발자크의 <무신론자의 미사>, 에밀리 브론테의 <슬픈 미나 로리>, 이탈로 칼비노의 <마법의 궁전>, 그레이엄 그린의 <꿈의 정원>처럼 아직까지 유일 번역본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특히 칼비노의 책은 소설이 아니라 민담 선집인 <이탈리아 민담>(1956)에 수록된 200편 가운데 10편을 소개한 것이어서 더욱 이채롭다. 장편 소설은 대부분 번역되고 강연록 <왜 고전을 읽는가>와 편저서 <세계의 환상 문학>도 간행되었지만, 순수 창작이 아닌 민담집이 번역될 가능성은 아무래도 낮아 보이니, 사실상 향후로도 유일무이한 번역본으로 남지 않을까.
다만 번역과 편집은 그리 좋지 않아서 오타도 많고 오역도 많으며, 영어권 이외의 작가들은 결국 영역본의 중역이기 때문에 가치도 높지 않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판매도 신통치 않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가의 60% 정도로 할인 판매를 했는데도 그리 많이 팔리지는 않은 듯하고, 그래서인지 지금 와서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듯하다.
지금 알라딘에서 검색하면, 원서인 펭귄 60주년 박스는 아예 등록조차 안 되어 있고, 2015년의 "80주년 클래식 단편 80권 세트"와 "모던 클래식 단편 50권 박스세트"만 나온다. 마침 2025년이 90주년이니 올해 안에 "90권 세트"가 나올지 문득 궁금해진다. 또다시 10년 뒤인 2035년의 100주년에는 뭐가 나올지, 또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기는 할지도 궁금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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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블랙(고전)세트 / O = 오렌지(현대작)세트
01. O-UK 여름 (알베르 카뮈)
02. O-UK 모델 (아나이 닌)
03. B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
04. O-UK/US 악마의 발 (코난 도일)
05. O-UK/US 수도승의 전설 (안톤 체홉)
06. B 순결한 여인 (구스타프 플로베르)
07. B 영웅들의 배 아르고 (아폴로니우스)[*]
08. B 홍루몽 (조설근)
09. B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10. O-UK 일곱 편의 요크셔 이야기 (제임스 헤리옷)[*]
11. B 리시스트라타 (아리스토파네스)
12. O-UK/US 행복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
13. O-UK 예언자 (칼릴 지브란)
14. B 비곗덩어리 (기 드 모파상)
15. O-UK 소니의 블루스 (제임스 볼드윈)[*]
16. O-UK/US 버틀비 (허먼 멜빌)[*]
17. B 오딧세우스의 항해 (호메로스)
18. B 영혼에 관한 크리슈나의 대화
19. O-UK/US 동산지기 (루드야드 키플링)[*]
20. B 유형지에서 (프란츠 카프카)
21. B 무신론자의 미사 (오노레 드 발자크)[*]
22. B 아편의 쾌락과 고통 (토머스 드 퀸시)[*]
23. B 이탈리아에서 온 편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24. O-UK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드 프로이드)
25. B 사냥꾼의 앨범 (이반 투르게네프)
26. O-UK 해변의 별장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27. B 슬픈 미나 로리 (샤롯 브론테)
28. B 키스 (케이트 쇼팽)[*]
29. O-UK 마법의 궁전 (이탈로 칼비노)[*]
30. O-UK/US 꿈의 정원 (그레이엄 그린)














































































































